사람들은 태어나면서 각자의 이름을 가진다. 기업도 마찬가지다. 기업에 이름을 붙인 다음엔? 로고를 만들고 아이덴티티를 부여하는 작업이 기다린다. 김현 디자인파크 대표(64)는 브랜드에 숨결을 불어넣는 아이덴티티 디자이너다. 그가 지난 30년 동안 아이덴티티를 불어넣어 새롭게 탄생시킨 브랜드를 세어보면 400개가 훌쩍 넘는다. BC카드, 신한은행, 국민은행, 청정원, 교보생명, 아이리버, 티머니… 주위를 둘러보면, 대한민국은 그의 디자인으로 넘친다. 누구도 그의 디자인에서 벗어날 수 없을 정도다. 그는 지금도 ‘디자인파크’라는 공원에서 뛰고 있다. 인터뷰는 대학로에 위치한 디자인파크 사무실에서 진행됐다. 글 진민섭기자 story@cauon.net  사진 임기원기자

 

88년 서울 올림픽을 기억하는 이들에게 ‘호돌이’는 ‘88 올림픽’ 하면 함께 떠오르는 상징이다. 아이덴티티나 마스코트 개념이 전무하던 시절, 대한민국은 세계적인 행사에 앞서 서울의 상징이 필요했고 국민들의 공모로 호랑이가 결정됐다. 국민들이 뽑은 호랑이를 ‘호돌이’로 다시 태어나게 한 사람이 바로 김현 대표다. 이후로 그에게는 항상 ‘호돌이 아빠’라는 수식어가 붙는다.


-‘호돌이 아빠’와 호돌이를 떼놓고 이야기 할 수 없다. 호돌이 이야기부터 해보자.
“81년에 서울이 88년 올림픽 개최지로 선정되고 마스코트를 정해야 했는데, 당시 1년 넘게 국민 공모를 받았다. 그때만 해도 전국에서 엽서를 통해 공모를 받던 시절이다. 별의별 게 다 들어왔다고 한다. 진돗개, 금관, 고려청자 등등… 그중에서 호랑이로 정해진 상태였다. 이후에 서울올림픽 조직위원회측에서 올림픽 마스코트 디자인을 7명의 디자이너를 지명해 공모전을 실시했는데 내가 그중 한명이었다. 당시 나는 대우그룹 디자인팀에서 일하고 있었다. 아마 지명받은 사람들 중 직장생활을 하던 사람은 나밖에 없었을 거다. 낮에는 대우그룹 디자인실에서 일하고, 밤에는 호랑이를 그렸다.”


-호랑이가 ‘호돌이’로 변신한 과정이 궁금하다.
“호랑이 그림을 한 500개 넘게 수집했던 것 같다. 그림책에 있는 호랑이, 생물도감의 호랑이 등등 수많은 호랑이 그림을 모았다. 지금이야 인터넷으로 찾으면 해외에 있는 호랑이도 쉽게 찾을 수 있지만, 그땐 그런 게 있었겠나, 이민 간 친구들한테 부탁해서 바다 건너 호랑이 사진까지 죄다 섭렵했다. 한 번은 동물원에 가서 하루종일 호랑이 구경만 한 적도 있다.”

▲ 완성된 호돌이 포스터를 배경으로 김현 대표가 포즈를 취하고 있다. 당시 그의 나이는 35세였다.

 

-하나의 디자인이 나오기까지 그 정도의 노력이 들어갈 줄은 몰랐다.
“스케치를 한 300개는 했을 거다. 하지만 3개월 동안 난리를 쳐도, 결국 최종 작품은 마감 직전에 나오더라.(웃음) 제출하고 오는 날, 하늘이 노래지면서 풀썩 쓰러졌다. 정말 진이 다 빠질 정도로 에너지를 쏟았던 거다. 나중에 사람들한테 이런 이야기 하면 ‘그건 좀 거짓말 아니야?’라고 말하기도 한다. 하지만 정말 3개월 정도 잠도 못자고 모든 걸 쏟아 부으면 그렇게 될 수밖에 없다. 탈진이 안되면 열심히 한 게 아니다.”


-지금 그때로 돌아가라고 한다면 다시 할 수 있을까?
“당연하다. 그렇게 몰입할 때 가장 희열을 느낀다. 고통스럽긴 하지만 분명한 목표가 있었다. 그런 기회라는 게 흔치 않기 때문이다. 누구에게나 주어지는 기회도 아니고, 매일 공모에 당선되는 상상을 할 때면 얼마나 짜릿했는지 모른다. 그래서 몇달 밤을 새도 참을 수 있었다.”


-당선금도 꽤 많이 받았을 것 같은데.
“지명비로 50만원을 받고, 당선금으로 300만원을 받았었다. 엄청나게 큰 액수는 아니었다. 자료수집 할 때 돈을 워낙 많이 써서 별로 남은 건 없었다.(웃음)”


-호돌이로 일약 스타가 됐지만, 디자인을 처음 했을 때는 참가하는 공모전마다 탈락했었다고 들었다.
“고3 때 처음 공모전을 시작했다. 그때부터 3년 동안, 내는 족족 떨어졌다. 나중에 세보니까 총 35번 떨어졌더라.”


-그 정도 떨어졌다면, 재능이 없다며 포기할 수도 있지 않았을까?
“별 수 없었다. 할 줄 아는 게 그림밖에 없었기 때문에.(웃음) 탈락했다는 소식을 듣고 당선작을 한번 확인해보면, 내가 생각해도 나보다 훨씬 잘했더라. 그런데 어느 순간부터 당선작을 보고도 ‘내가 더 나은데?’라는 생각이 들기 시작했다. 그런 생각이 들기 시작하면서 36번째 공모전에 참가했는데, 드디어 처음 상을 탄 거다.”


-어떤 작품이었나?
“69년도에 제일은행 창립 40주년 포스터였다. 당시 상금이 30만원이었다. 역대 공모전 중에서 가장 많은 상금을 걸었던 공모전인데, 줄곧 탈락만 하던 내가 상을 탄 거다. 그런데 굉장히 신기한 게, 한번 상을 타니까 그다음부터는 거짓말처럼 단 한번도 1등을 놓치지 않았다. 10년 동안 거의 80번 정도 내내 1등만 했다.”


-내내 1등을 독차지 하니 주변의 시기나 질투도 많았겠다.
“나중에는 별소리를 다 들었다. 혼자 다 해먹는다며 욕도 먹었다. ‘현상금의 사나이’라고 하더라.(웃음) 시상식을 다니다보면 자주 마주치는 사람들이 있다. 가는 곳마다 비결이 뭐냐고 질문을 많이 받았다. 그럴 때마다 35번 떨어져 보라고 말했다. 35번정도 떨어지다 보면, 자기가 왜 떨어지는지 알게 된다. 왜 떨어지는지 알게 되면 어떻게 해야 안 떨어지는지는 저절로 알 수밖에 없다. 그런데 이후에 내 기록을 넘었다는 사람은 아직 들어보지 못했다. 지금 생각해보면 참 미련하다. 3년 동안 35번이나 떨어졌으니 말이다.(웃음)”


공모전에서 35번 떨어졌다
한 번 되고 난 후 내내 1등했다
비결이 뭔지 묻는다면
35번 떨어져보라고 답한다

 

그는 첫 공모전 수상을 시작으로 본격적인 디자인 인생을 시작한다. 이후 호돌이 공모에 당선된 83년부터는 공모전 참가를 그만두고 디자인파크라는 회사를 세워 아이덴티티 디자인을 시작한다.


-일반 독자들에게 ‘아이덴티티 디자인’이라는 단어는 여전히 생소하다. ‘로고’를 만든다고 생각하면 될까?
“아이덴티티 디자인의 시작은 ‘나는 누구인가?’다. 단순히 디자인만 하는 것이 아니라 그 기업의 철학, 사상을 하나의 디자인으로 집결시키는 작업이다. 그렇기 때문에 보통 1년이 넘는 장기 프로젝트로 진행된다. 그리고 혼자 할 수 있는 작업이 아니다. 디자인을 하나 만들면 몇백개가 넘는 응용디자인을 개발해야 한다. 그렇기 때문에 호돌이 이후에 ‘디자인파크’ 회사를 세워 팀으로 작업하고 있는 거다.”


-하나의 디자인이 탄생하기까지 어떤 과정을 거치나.
“우선 첫단계는 기업의 최고경영자를 만나서 기업에 대한 이야기를 듣는 거다. 기업의 장점은 무엇인지, 단점은 뭔지, 라이벌은 누구인지, 앞으로 어떤 전략으로 갈 건지 듣는다. 회사의 임원과는 거의 다 1:1 인터뷰를 진행한다. 그 다음엔 아래 직원들을 인터뷰한다. 임원들과 다르게 생각할 수도 있기 때문이다. 마지막으로 소비자조사를 한다. 요즘엔 해외 소비자들까지 조사하는 경우도 많다.”


-디자인을 한다고 하면 책상에서 작업하는 것만 상상했는데 의외다.
“보통은 그렇게 생각할 수 있다. 그러나 CI 하나에 그 기업에 대한 모든 철학이 담기는 것이기 때문에 간단한 작업이 아니다.”


-아이덴티티 디자인이 왜 중요한가.
“CI 하나로 기업의 운명이 바뀐다. 대표적으로 청정원 브랜드를 들 수 있다. 청정원은 원래 화학조미료의 이미지가 강했던 미원이라는 브랜드다. 미원도 천연 재료로 만들어졌지만, 기존의 화학조미료 이미지가 워낙 강해 소비자들의 외면을 받아왔었다. 그런 이미지를 바꾸기 위해 브랜드 이름을 청정원으로 바꾸고 심벌을 새로 만들었다. 심벌을 바꾼 이후에 매출이 엄청나게 올랐다. 오로지 디자인만의 힘은 아니겠지만, 기업의 운명을 결정짓는데 아이덴티티 디자인이 차지하는 위치는 엄청나다.”


-럭키와 금성을 합쳐서 만든 럭키금성의 이름을 LG로 바꾼 것도 좋은 예 아닌가?
“그것도 우리가 작업한 거다. 한국에서는 럭키와 금성이 워낙 유명했기 때문에, 럭키금성이라는 브랜드 이름이 이상하지 않았다. 하지만 LG가 해외진출을 시작하면서 브랜드 이름이 걸림돌이 됐다. 강아지 이름 같기도 하고.(웃음) 브랜드 이름을 바꾸는 일이 보통 작업이 아니다. 이름을 한번에 바꾸면 위험이 너무 크기 때문에 먼저 야구팀에 LG라는 이름을 붙여봤다. 그게 LG트윈스다. 그 다음엔 편의점에 이름을 붙여 LG25시를 만든 거다. 두개를 거쳐 반응이 좋자 그제서야 브랜드 이름을 LG로 완전 바꿨다. 그 과정이 5년이나 걸렸다.”


-디자인을 하다 보면, 클라이언트와 갈등을 빚는 경우도 많지 않나.
“디자인 하는 사람들은 아무리 좋은 디자인을 만들어도 이제 ‘절반’했다고 말한다. 디자인이 나와도 클라이언트의 승인을 받지 못하면, 세상에 나올 수 없기 때문이다. 디자인은 너무 좋았지만 빛을 못본 작품들도 여럿 있다. 고집 센 CEO들이 ‘난 저거다’라고 마음을 굳히면 돌이키기 힘들다.”


-그럴 때는 클라이언트에 맞춰서 디자인을 하는 편인가.
“설득의 작업이 중요하다. BC카드가 좋은 예다. 89년에 새 CI를 의뢰받았는데, 당시로는 혁신적인 붉은색 원을 사용했다. 붉은색은 금융권에서 적자를 의미하기 때문에 금기시되던 색상이다. 역시나 처음부터 엄청난 반대가 있었다. 하지만 소비자조사 결과를 통해서 설득했다. CI가 발표된 이후에 BC카드 실적이 급상승했다. 그러자 부정적이라고 지적했던 점들을 오히려 칭찬하기도 하더라.”
 

-디자인에서 가장 중요한 건 뭔가.
“단순함이다. 결과는 단순하고 명쾌할수록 좋고, 과정은 어렵고 복잡할수록 좋다. 요즘은 그 반대현상이 너무 많다. 과정은 컴퓨터가 생기면서 쉬워지고, 결과는 설명을 들어야 할 정도로 어려운 경우가 많다.”


-디지털 시대지만 아날로그 감성이 중요하다고 2000년의 인터뷰에서 말했다. 10여년이 지난 지금도 유효할까?
“당연하다. 내가 우리 회사의 마지막 아날로그 세대인데, 제일 컴퓨터를 못다룬다.(웃음) 젊을수록 디지털에 능하고 기능적으로 우수하다. 하지만 거기엔 흠이 있다. 스케치를 할 때, 사람이 손으로 스케치 하고 마지막 작업에서 컴퓨터로 다듬는 경우가 있고 처음부터 컴퓨터로 시작하는 경우가 있다. 나는 그 둘을 90% 이상 구별할 수 있다. 왜냐하면 컴퓨터로 작업한 결과를 보면 차갑다. 왠지 모르게 인간미가 떨어진다. 정확하긴 하지만 차갑고 날카롭다. 손으로 스케치해야 따듯하다. 그래서 나는 지금까지도 항상 손으로 스케치하고 있다.”


-400여개의 CI작업을 했다. 그중에 가장 애착이 가는 디자인을 꼽는다면.
“(작업했던 디자인들을 보며)지금도 작업했던 디자인들을 보면 가슴이 약간 뭉클하다. 눈물이 나려고 한다. 이것들을 하느라고 백발이 되고 머리가 다 빠졌으니까… 여기에 내 청춘이 담겨있다. 애착 가는 디자인을 꼽는다면, 사실 깨물어서 안아픈 손가락은 없지 않나.(웃음) 받을 때마다 대답하기 곤란한 질문이다. 그래도 뽑아보자면 호돌이다. 지금까지 나를 먹여 살린 효자니까.(웃음)”


-지금까지 43년 동안 쉬지 않고 일했다. 더 이룰 것이 없어 보일 정도인데 앞으로 뭘 하고 싶은가.
“요즘 다시 호랑이를 그리고 있다. 동시에 2018년 평창 올림픽의 상징을 호랑이로 한번 더 하자는 캠페인을 하고 있다. 분명 상징을 정하자는 이야기가 곧 나올 텐데, 이번 기회에 대한민국의 상징을 호랑이로 쐐기박자는 거다. 미국은 대머리독수리, 호주는 캥거루, 인도는 코끼리처럼 국가와 연결된 상징은 돈으로 환산할 수 없는 큰 자산이 될 수 있다. 동계올림픽이 시작되기 전에 호랑이를 주제로 한 전시회를 하려고 생각 중이다. 최소한 100마리는 그리려고 준비를 끝내뒀다. 그리고 기회가 된다면 평창 올림픽 마스코트 제작이나, 심사에 참여하고 싶다.”


-아이덴티티 디자인은 ‘나는 누구인가?’로 시작한다고 말했다. ‘김현은 누구인가?’
“아직도 디자인 중이다. 가장 큰 디자인은 자기 인생을 디자인하는 것이 아닐까? 죽기 전까지는 그 해답을 찾고싶다.”

 
중앙의 새 얼굴을 만들다

▲ 왼쪽부터 예전 심벌과 최종 후보 4안중 탈락한 시안 3가지.

 

기업의 아이덴티티를 CI가 보여준다면, 대학의 아이덴티티를 보여주는 UI도 있다. 2002년 중앙대는 일명 ‘식물 재단’이라고 불리며 침체돼있던 대학 분위기를 바꾸기 위해 전폭적인 개혁을 단행한다. 그 핵심은 UI를 개편하는 것이었다. 당시 UI 개편을 진행했던 이명천 광고홍보학과 교수는 “UI 개편은 학교의 가장 중요한 일이었고, 누가 그 일을 맡게 되는지가 최대의 관심사였다”고 회고했다. 초미의 관심사였던 중앙대의 ‘얼굴’을 새롭게 디자인한 사람이 바로 김현 대표다.
기존 중앙대의 로고는 월계수, 책, 학교 이름 등이 들어간 가장 일반적인 형태의 디자인이었다. UI 개편의 핵심적인 목표는 ‘혁신’과 ‘창조’였다. 그만큼 당시 중앙대는 변화에 목말라하고 있었다. 디자인 작업은 역시 쉬운 일이 아니었다. 김현 대표는 10개월에 걸쳐 250개의 디자인을 만들었고, 그 중 4개의 시안이 최종 후보에 올랐다. (옆의 3개의 시안이 당시 후보) 지금의 로고는 당시 학생, 교수, 동문, 교직원을 대상으로 진행된 투표에서 45%의 지지를 받아 탄생한 것이다.
2002년 10월 11일, 새로운 UI 선포식이 열리며 중앙대의 상징은 이전과 전혀 다른 현대적인 모양을 갖추게 된다. 김현 대표가 “처음 로고를 만들고 오히려 회사 측에서 너무 파격적인 건 아닌가라는 고민을 할 정도였다”고 말할 정도로 당시엔 파격적인 디자인이었다. 기존의 상징에서 학교 이름만 빼고 모든 것이 바뀌었고, 복잡한 요소들을 모두 걷어낸 채 중앙대의 이니셜인 CAU만 남게 됐다. 중앙대가 새로운 얼굴과 함께 ‘미래를 향한 창’을 활짝 여는 순간이었다.


당신에게 중앙대란?
“아쉬움이다. 서라벌예대 시절에 학교를 다녔다. 내가 다닐 때만 해도 선배가 거의 없어서 백지상태에서 시작했다고 무방하다. 선배들이 후배들을 챙겨주는 다른 학교들을 보며 부러워 하곤 했다. 그러나 다들 열심히 해서 당시 중앙대는 디자인계에서 떠오르는 다크호스로 떠올랐다. 하지만 안성캠퍼스로 옮겨가면서 예전의 명성을 잃게 된 것 같아 안타깝다. 디자인학과는 절대 지방에 가서는 안된다. 무조건 서울에 있어야 한다. 가장 현대적 감각이 중요하고 중심지에서 일어나는 일을 느껴야 하는 학과기 때문이다. 다시 디자인학과가 서울로 돌아온다면, 예전의 명성을 찾는 건 시간문제일 거다. 될 수만 있다면 후배들이 흑석동에서 수업을 듣기를 바란다. 지금은 아쉬움이지만, 조만간 다시 자랑이 될 날을 기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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