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0년대 초반 중앙대는 개교 100주년 사업 Dragon 2018(현재 CAU 2018+) 사업을 계획합니다. 더불어 중앙대 미래에 대한 포석을 준비하기 위해 학교에는 신축건물, 신설학과, 신캠퍼스 등 모든 것이 바뀌고 있습니다. 그런데 중앙인 여러분은 중앙대의 시초가 어떤 모습이었는지 알고 계신가요. 미래를 준비하기 이전에 과거를 반추하는 시간이 필요한 중앙인에게 중대신문 기자들이 2000년 이전의 중앙대 모습을 다섯가지 키워드로 정리해 보았습니다. 현재는 볼 수 없는 중앙대 추억 두가지도 역사 속에서 꺼내 보았습니다. 또한 21세기 이전의 중앙대 역사를 한눈에 알아 볼 수 있는 연혁표를 참고하신다면 개교기념특집호 만으로 약 백여년 간의 중앙대 역사를 핵심 요약하실 수 있을 것입니다. 지금 당장 타임머신을 타고 2000년 이전의 중앙대 모습을 확인해 보세요. 의에 죽고 참에 사는 중앙대 여러분들 모두에게 외칩니다. “들리나요 중앙대. 들린다면 응답하라 1918.”

 

 

20세기 중앙대가 보내온 5가지 응답

1
1918년~1953년
의와 참으로 시작한 중앙대
의혈중앙의 시작은 1918년으로 거슬러 올라갑니다. 중앙대학교의 모태는 중앙교회로부터 창설된 중앙유치원입니다. 이후 1922년 중앙유치원은 사범과를 설치하게 되고 중앙보육학과로 발전되게 됩니다. 이때 임영신 박사는 흑석동에 부지를 매입하고 서른네살에 교장으로 취임합니다.


- 재정난 위기맞아
1937년 학교 확장 문제로 재정난 위기가 찾아오고 말았습니다. 임영신 박사는 미국으로 건너가 자금모금을 위한 활동을 시작합니다. 이후에도 자선 사업가 암스트롱 여사와 애니 파이퍼 여사를 만나 자금을 확보하게 됩니다. 이로써 중앙보육학교의 위기를 모면할 수 있게 됩니다. 파이퍼 여사는 이후에도 1938년 10월 30만 달러를 기부하고 중앙보육학교를 위한 후원회인 ‘파이퍼재단’을 설립합니다. 그 결과 중앙보육학교의 숙원사업이었던 새 교사와 기숙사, 유치원 건물을 확충할 수 있게 됩니다. 1945년 8월 임영신 박사는 일본의 탄압으로 잠시 폐쇄됐던 중앙보육학교 문을 열게 됩니다. 여성교육에 앞장선 임영신 박사는 중앙여자전문학교를 중앙여자대학으로 승격시킬 모든 준비가 갖추고 중앙여자대학으로 개편하게 됩니다.


- 여대에서 남녀공학으로
이를 발판으로 학교는 교육이념을 더욱 확대 발전시켜 나가고자 남녀공학으로 전환하게 됩니다. 당시 재학중이던 여학생들은 남녀공학을 반대한다는 건의를 내지만 교육제공 기회와 발전을 위해 최종적으로 남녀공학으로 학칙이 변경되었습니다.
꾸준한 성장 끝에 드디어 중앙대학은 1953년 2월 28일 종합대학으로 승격됩니다. 대학승격 후 교정을 거닐던 이상연 동문(체육학과 62학번)이 말하는 학교는 단란하고 따뜻했습니다.
“그 시절 비좁은 공간에서 몇 명 안 되는 학생들이 함께 꿈을 키웠다. 가족 같은 분위기 속에서 였다.”

 

2
1950년~1960년
전쟁으로 인한 휴교령 극복하다

1950년 5월 중앙대는 해방 이후 대학교로 승격 이후 첫 졸업생을 배출하게 됩니다. 하지만 6월 25일 일어난 민족의 비극은 발전의 기로에 선 중앙대를 가로막습니다. 한국전쟁으로 무기한 휴교를 맞게 된 중앙대는 1.4후퇴와 함께 부산에 임시사무소를 설치합니다.
갖은 악재에도 중앙대는 강의를 멈추지 않았습니다. 1951년 4월 중앙대는 부산 송도에서 강의을 진행합니다. 미군 수송중대가 사용하던 흑석동 교사 대신 중앙대는 당시 서울에 본부를 두고 교사로는 학교 사택을 강의실로 개조하여 강의를 진행했습니다.


-이리 분교 설치
중앙대는 1.4후퇴 이후 이리(현 익산시)와 서울에도 분교를 설치해 강의를 시작하게 됩니다. 당시 이리분교에는 중앙대생 말고도 피난 중인 서울대, 연세대 학생들도 강의를 듣는 등 수강생이 656명에 달했습니다. 전쟁이 끝난 후 이리분교는 문교당국의 존속 허가를 받고 새로운 교사로 재탄생하게 됩니다.
전선이 어느 정도 고착되고 난 이후 53년 2월 문화교육부의 허가를 받아 종합대학으로 승격된 중앙대학은 문리과대학, 법정대학, 경상대학, 약학대학 등 3개 대학 9개 학과 및 대학원을 설치하고 당시 교장이었던 임영신 박사를 총장으로 임명해 강의를 시작하게 됩니다. 8월 휴전과 함께 흑석동으로 교사를 옮긴 중앙대는 54년 4월 미군으로부터 교사를 인수받습니다.


-흑석동에서 첫수업
전쟁의 화마에도 발전을 멈추지 않은 중앙대는 54년 5월부터 현재 중앙대학교 부지인 흑석동에서의 첫 대학 강의를 시작합니다. 이후 59년 중앙도서관을 신축하고 61년 지금의 서라벌홀을 완공하는 등 학내 환경을 재정비 하기 시작합니다. 더불어 57년 교내 방송국인 ubs와 영자 신문인 중앙헤럴드를 창간하고 61년 rotc를 창립하는 등 중앙대는 학생자치활동과 더불어 학교 발전에 박차를 가하기 시작합니다.

 


3
1960년~1987년
민주화 열기 속 발전하는 중앙대

중앙대는 어두웠던 대한민국 근대사에서 저항의 세력으로 빠지지 않고 등장하는 학교입니다. 시민들과 학생들은 반항하는 이들에게 총을 겨누는 정권의 무자비함 때문에 시대의 모순에 선뜻 나서지 못했습니다. 하지만 1960년에 일어난 3.15 부정선거는 시민들과 학생들을 참을 수 없게 만들었습니다.


-4.19에 희생 된 6인 열사
결국 중앙대 학생 1000여명은 4월 19일 자유당 정권을 규탄하는 선언문을 채택하고 교문 밖으로 나섰습니다. 김태규 동문(법학과 59학번)은 “독재정권에 저항하기 위해 격렬하게 시위를 벌였다”고 회고했습니다. 이 과정에서 6명의 중앙대 학생들이 희생되었습니다. 중앙대는 4.19 때 희생된 이들을 기억하기 위해 의혈탑을 설치해 그 뜻을 기리고 있습니다. 정의를 위해 싸우다 희생된 6인 열사는 아직까지도 학생들에게 귀감이 되고 있습니다.
6월 항쟁 때에도 중앙대는 일어났습니다. 4.13 호헌 조치를 기점으로 발생한 6.10항쟁 당시 중앙대 학생들은 학외집회와  더불어 수많은 학내집회를 진행했습니다. 학교 내에서는 물론 거리로 나서 민주화에 대한 열망을 표출했고 각종 학회를 중심으로 현재 대한민국의 민주주의가 나아가야할 방향에 대한 토론이 진행됐습니다. 특히 영신관 앞에서는 2000 여명의 학생들이 대한민국을 위한 서명에 참여하고 거리로 나가 민주주의를 외치며 행진을 하기도 했습니다. 학생들의 시위가 잦아지면서 학교의 돌담은 투석전을 위한 재료로 사용되었습니다. 결국 학생들의 시위로 담이 모두 허물어지는 바람에 담을 대신해 철조망을 치기까지 했습니다.


-학도호국단 사라지고 총학생회 부활
6.29선언 이후 중앙대도 민주화의 결실이 맺어집니다. 학도호국단이 폐지되고 총학생회가 부활했습니다. 학원자율화가 진행되었고 그간에 통제받던 대학언론들도 편집권의 자율을 보장받았습니다. 꿈에 그리던 민주주의의 햇살이 중앙대에 비춰졌습니다.

 

4
1972년~1982년
재도약에 시동을 걸다

중앙대가 예술대로 높은 명성을 알리고 있는 현재의 자리에 오기까지, 예술대의 역사를 말할 때 빼놓을 수 없는 것이 서라벌예술대학입니다.


-서라벌예대 인수 예술대 개편
1972년 6월, 중앙대는 서라벌예술대학을 인수한 후 2년 뒤에 이를 소속 단과대학인 예술대학으로 개편합니다. 잠시 서라벌예술대학을 설명하자면 1953년에 설립된 대한민국 최초의 예술대학으로 문예창작학과, 연극학과, 무용과, 사진학과, 공예학과가 신설되었습니다. 중앙대 예술대학의 또 하나의 뿌리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이처럼 두갈래로 나뉜 뿌리가 한가지로 합쳐집니다.


-안성에 제 2캠퍼스 병설
곧이어 78년도에 경기도 안성에 제2캠퍼스인 안성캠퍼스를 병설하며 중앙대는 본격적으로 예술대학 시대를 열게 됩니다 79년부터 신입생을 맞은 중앙대는 새로운 도약을 꿈꾸게 됩니다. 하지만 제2캠퍼스에 대한 무리한 시설투자가 학교재정에 무리를 야기해 재단의 부채를 가중시키기도 합니다.
서울캠퍼스 또한 증축과 준공에 열을 다합니다. 61년에 지어진 진선관을 3100여평 규모의 건물로 탈바꿈 시켰습니다. 바로 지금의 서라벌홀입니다. 2400여평의 의과대학 교사인 자연관을 74년에 준공하고 의과대학에 간호학과 또한 신설됩니다. 1978년 6월에는 서울 중구 필동에 있는 의과대학 부속 성심병원의 신관 1,450평을 준공하였습니다.
중앙대의 설립자이자 발전과정의 주역인 승당 임영신 박사가 1977년에 서거합니다. 학교 안에서 장례를 지내고 시신은 지금의 서울캠 기숙사 터인 중앙동산에 안장됩니다. 이 묘역은 오늘날까지 학생들에게‘할매동산’으로 불리며  친근한 이름으로 불리게 됩니다.

 

5
1987년~2000년
C급 재단으로 지체된 발전

 87년 중앙대는 재단의 비리문제로 떠들썩했습니다. 711억원의 학교부채가 있었던 사실이 밝혀지고 임철순 이사장이 학교자금으로 36억원의 비자금을 조성하고 있었다는 사실이 드러났기 때문입니다. 87년 재단문제가 커지자 재일사업가 김희수씨가 중앙문화학원을 인수해 재단 이사장으로 취임하게 되었습니다. 새로운 재단은 교육환경 개선과 투자를 약속했지만 재단교체 후에도 법인의 투자 능력과 의지에 대한 의구심은 끊이질 않았습니다.


-대학평가에서 공대 C급 판정
재단에 대한 불신이 팽배하던 와중 설상가상으로 중앙대는 교육부 평가에서 C급 판정을 받게 됩니다. 91년 교육부가 실시한 대학별 입학정원 조정을 위한 대학 평가에서 중앙대는 하급대학이라는 주홍글씨를 새기게 된 셈입니다. 재단과 학내행정에 대한 불만이 치달은 상황에서 ‘C급 대학’의 여파는 엄청났습니다. 학생들은 학교발전에 대한 문제를 제기하고 나섰고 급기야 이사장실과 주요 행정실을 점령하기에 이르렀습니다. 뿐만 아니라 이사장 집기를 청룡연못에 투척하는 등의 급진적인 방식으로 불만을 표출했습니다.
 

-77억 불법인출 논란
재단과의 불협화음은 여기서 그치지 않았습니다. 98년 당시 김희수 이사장 개인 회사인 금정상호신용금고(이하 금정금고)가 영업정지를 당하면서 각종 의혹이 불거졌습니다. 이 과정에서 중앙대가 금정금고에 예치한 예금 중 77억원이 불법인출된 것으로 확인되어 논란을 빚었습니다. 2년여의 법정공방 끝에 중앙대는 법정에서 승소해 예금액을 환수 받을 수 있었습니다.
이후에도 학생들은 교비확충과 재단의 재정투자확대를 요구했지만 재단은 재정위기로 학생들의 요구를 충족시키지 못했습니다. 점차 줄어들던 재단전입금은 마침내 99년에는 예산 항목에서 사라지게 됩니다. 사라진 재단전입금으로 재단은 ‘천원재단’, ‘식물재단’이라고 불리기까지 했습니다.

 


사라진 것들을 찾아서

 

 

미스중앙은 사라지고 미스터중앙만 남았다
요즘 중앙대 학생들에겐 생소한 이야기겠지만 수십 년 전까지만 해도 매년 개교기념일엔 중앙대의 내로라하는 미녀들이 한자리에 모이곤 했습니다. 바로 미스중앙선발대회가 열렸기 때문입니다. 이 대회는 미스코리아 선발대회처럼 중앙대의 여학생들이 후보로 등록하여 미의 우열을 가리는 대회였습니다. 미스중앙선발대회는 미스중앙, 인기중앙 등의 분야로 나누어 미인들을 선발했습니다. 당시를 기억하는 이상연 동문(체육학과 62학번)은 “당시 학생들의 참여도도 높고 관심도 굉장했다”고 말했습니다.
미스중앙은 역사의 뒤편으로 사라졌지만 함께 열리던 미스터중앙대회는 아직 건재합니다. 중앙대 최고의 몸짱을 가리는 미스터중앙대회는 매년 개교를 기념하여 열리고 있습니다.

 

 

그리운 자장면 잔디밭
중앙대 정문 잔디밭에서 잔디밭 로망을 꿈꿔보셨나요. 하지만 섣불리 잔디밭으로 들어가기엔 눈치가 보이지 않으신가요. 과거 중앙대 학생들에게는 자유로이 쉴 수 있고 음주도 즐길 수 있는 루이스가든이 있었습니다. 또한 굶주린 학생들에겐 자장면을 시켜 먹을 수 있는 일명 ‘자장면 잔디밭’으로 불리는 위락장소로 자리 매김하게 되었습니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102관(약학대학 및 R&D센터)가 들어서면서 09학번부터는 루이스가든을 볼 수 없게 되었습니다. 졸지에 그동안 루이스가든에서 숙박을 하며 학생들의 희로애락을 엿듣던 로뎅상은 갈 곳을 잃게 되었습니다. 최근 동문들의 기억 속에만 남아있던 로뎅상이 대학원 앞으로 이사를 하게 되었습니다. 현재 루이스가든은 사라졌지만 그 장소엔 중앙대학교 최초 친환경 건물로 인정받은 102관(약학대학 및 R&D센터)이 학생들의 편의를 대신하고 있습니다.

 

▶ 개교기념특집 기획팀
송민정 기자 (mj@cauon.net), 김혜원 기자, 조동욱 기자, 최아라 기자


▶ 도움주신 분들
김태규(법학과 59학번), 이상연(체육학과 62학번), 손의동(약학과 74학번), 이대영(문예창작과 81학번) 사진 중대신문자료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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