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순태
녹십자 사장 (사회사업학과 73학번)

녹십자 조순태 사장(59)은 평범한 ‘영업맨’들에게 전설과 같은 존재다. 약이라곤 전혀 몰랐고 전공도 딴판이라 우려속에 입사했던 ‘꼴찌’ 신입사원은 28년 후, 7000억 매출을 올리며 제약업계 국내 2위를 다투는 녹십자의 사장이 된다. 28년 동안 굴곡도 없었다. 늘 일등이었다. 그의 이력에는 쉼표 한 번 찍히지 않았다. 하지만 말단 영업사원에서 사장 자리까지 올랐기 때문일까. 조순태 사장에게 ‘사장님 포스’는 잘 느껴지지 않는다. 끊임없이 기자들에게 차를 권하고, 추운 기색을 보이자 “에어컨을 끌까요?”라고 묻는 그를 보니 알 것 같다. 그가 사장에 오를 수 있었던 이유가 평범한 아저씨처럼 보이는 ‘사람다움’이라는 것을.

 

“사장이 된 지금까지도 나는 영업사원이다”

-‘꼴찌로 입사한 사장’이라는 수식어가 있다. 진짜 꼴찌로 입사했나.
“그 수식어에 굉장히 불만이 많아요. 사실 입사성적이 꼴찌는 아니거든요. 예전에 일간지에서 인터뷰를 했었는데, 기자가 꼴찌라고 이야기해야 기사가 살았는지 그렇게 써버렸더라고요. 그런 수식어가 지금까지 따라올 줄은 몰랐죠.(웃음) 하지만 전문적인 지식을 요구하는 제약회사에서 자연과학을 전공했던 동기들과 비교했을 때 확실히 부족했던 면이 있었죠. 그래서 제 자신을 항상 꼴찌라고 생각했던 것 같아요.”
-제약회사와 전공인 사회사업학(현재 사회복지학)은 전혀 어울리지 않는다.
“처음 일했던 곳은 사회사업시설이었어요. 정신건강이 좋지 않은 사람들을 상담해주는 일을 했었는데, 제한된 공간, 제한된 영역에서 일하고 있다는 생각이 들더라고요. 전공을 생각해서 들어갔지만, 점차 복지기관에서 일하는 것만이 전공을 살리는 길은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어요.”
-제약회사도 국민 건강을 증진시킨다는 점에서 ‘복지’와 무관하지 않아 보인다.
“그렇죠. 사회사업학이라는 것이 어려운 처지에 있는 사람들을 돕는 것이고, 인간으로 태어난 이상 누구나 행복하게 살 수 있도록 돕는 거니까요. 결국 전공과는 다른 길을 걷긴 했지만, 대학에서 공부하며 느꼈던 바를 행동으로 실천한 것이라고 생각해요.”
-제약회사 중 특별히 녹십자를 선택한 계기가 있었나.
“제약회사들이 보통 00제약 00약품 같은 이름을 갖고 있는데 녹십자는 다르잖아요. 녹십자라는 회사명부터 매력적으로 다가왔어요. 희생·봉사를 상징하는 ‘십자’를 사명에 포함한 녹십자가 단순히 약만을 만드는 회사가 아니라 인류의 건강한 삶을 위한 회사일 거라고 생각했었죠.”
-영업직으로 입사했다. 영업직이 사회적으로 선호하는 직업군은 아니다.
“영업직이 선호하는 직업군은 아니었죠. 지금보다 더 심했을지도 몰라요. 하지만 저는 지금도 영웝사원을 했다는 것이 자랑스러워요. 저는 대통령·총리 같은 국가 대표자들도 넓게 보면 영업하는 사람들이라고 봐요. 궁극적으로 자국의 이득을 위해서 ‘영업’을 하는 것 아니겠어요? 고이즈미 전 일본총리가 부시 전 미국 대통령의 텍사스 농장에서 엘비스 프레슬리 흉내를 내면서 춤을 췄어요. 사람들은 어떻게 일국의 총리가 그런 재롱을 피우느냐고 할 수도 있겠지만, 결국은 일본의 국익을 위해서 일하는 거잖아요. 시작은 다 다르지만 결국 모든 일은 영업으로 귀결된다고 생각해요. 그 생각은 지금도 변함없어요. 사장이 된 지금도 저는 회사를 대표하는 영업사원이라고 생각해요.”
-인문학 전공 출신이라는 핸디캡은 어떻게 극복했나.
“신입사원 면접 때부터 이런 말을 들었어요. ‘자네 사회사업학전공인데 할 수 있겠어?’라고요. 저는 ‘뽑아만 주시면 회장님이 아주 잘 뽑았다고 생각하시게 하겠습니다’라고 말했고, 그 모습을 좋게 보셨는지 합격 했죠. 이후에 회장님과 한 약속을 지키기 위해서라도 머리 싸매고 미친 듯이 공부했어요. 지금도 신입사원 때 공부했던 노트를 갖고 있는데, 그때 생각하면 참 열심히 했지싶죠”
-회장님께서 나중에 잘 뽑으셨다고 말씀하시던가.
“중역이 되어서 이야기를 했는데 그때까지도 신입사원 면접 때 이야기를 하세요. 참 잘 뽑았다고 말씀하셨죠.(웃음)”
-‘꼴지’였지만 남들보다 앞서 갈 수 있었던 비결이 있었나.
“신입사원 때는 ‘신입사원’다운 태도가 필요하다고 생각해요. 뭐든 즐겁게 하려고 했어요. 사무실 바닥을 닦으라고 하면 보통 다른 동기들은 ‘대학 나와서 내가 이런 일까지 해야 해?’라고 생각했던 걸 저는 ‘어차피 신참이 하는 일이다’라며 먼저 나서서 했죠. 약 배송이 올 때도 직원들이 하는 일은 아니지만 먼저 가서 약 상자도 옮기고요. 그런 것들을 스트레스라고 생각하지 않고 그냥 운동거리라고 생각하려고 했죠. 스트레스 받지만 참고 일했던 거라면 그렇게 열심히 못했을 거에요. 저는 지금도 신입사원들에게 ‘강요에 의해 일하는 거라면 당장 그만두라’고 말해요.”
-이후 부임하는 지점마다 전국 최우수 지점으로 올려놓는 능력을 발휘했다.
“87년 인천지점에 발령을 받았을 때, 인천지점은 녹십자에서 가장 실적이 안 좋았던 곳 중 하나였어요. 그런데 2년 만에 전국 최우수 지점으로 선정됐죠. 제가 가는 곳은 늘 실적이 좋지 않은 지점들이었어요.”
-좋은 실적을 내는 지점으로 가면 편하게 일을 할 수도 있었을 텐데.
“생각해보면 제가 작전을 잘 썼는지도 몰라요. 잘되는 지점에 가봐야 더 잘되기는 어려워요. 그런데 몇 년 동안 ‘죽 쑤고’있는 지점에 가면 오히려 성장 가능성이 많거든요. 잘되는 곳에서 편하게 있고 싶다는 생각을 하기도 했지만, 안 되는 지점에서 6개월 개조작업을 하면 그 다음은 순탄대로 거든요. 이런 것들이 DNA에 축적되는 것 같아요. 나는 뭐든지 할 수 있다는 자신감이요.”
-‘영업의 제왕’의 영업 비결이 있다면.
“음… 영업의 비결이 따로 있을까요? 굳이 말하자면 정직과 성실, 부지런함 정도라고 생각해요. 너무나 평범한 이 말들 속에 모든 진실이 담겨있다고 생각해요. 그리고 무엇보다 사람을 대하는 일이기 때문에 인간적인 관계를 형성하는 게 중요해요. 영업하는 사람들이 물건 하나만 팔아먹으려고 접근하면, 거래가 끝남과 동시에 그 관계는 끝이에요. 하지만 저는 모든 고객과 보다 인간적인 관계를 만들려고 노력했어요.”

 

영업 사원이라는 것이 늘 자랑스럽다.

부임하는 지점마다 1등... 일부러 ‘죽 쑤는’ 곳 갔다

대통령도 영업직이다. 모든 일의 끝은 영업이다

 


-97년, 본부장에 올라 업계 최초로 약품 ‘리턴제’를 도입해 화제가 됐었다.
“‘리턴’은 ‘리콜’과 다른 개념이에요. 리콜은 제품에 하자가 있을 때 회사에서 보상을 해주는 것이고, 리턴은 제품에 하자가 없더라도 고객이 만족하지 못한다면 반품을 해준다는 거에요. 당시 리턴제를 한다고 하니 사내에서 엄청난 반대가 있었죠.”
-효과를 보고도 환불받으려는 고객들이 있을 수 있다곤 생각 안했나.
“물론 했죠. 하지만 약을 다 쓰고, 약통만 가져오는 사람들에게도 무조건 환불해주라고 지시했어요. 판매한 모든 제품에 대해 환불이 들어와도 10만 개인데 그래봤자 지출액은 10억 미만이니 광고비로 지출했다고 생각하면 될 거라고 믿었어요.”
-결국 성공적인 마케팅이었다고 평가받는다.
“꽤 많은 사람이 반품할 수도 있다고 예상했지만, 리턴한 사람은 몇 안 됐어요. 그래도 양심은 살아있더라고요. 사실 몇천원 때문에 빈통을 갖고 오기가 쉽지 않았을 거에요. 어떤 사람은 이를 두고 ‘신의 한 수’였다고도 말하더라고요. 우리가 이런 전략으로 성공하니까 다른 회사에서는 ‘우리가 먼저 하려던 일인데’라고 나중에서야 말했죠.(웃음)”
-남들보다 항상 승진이 빨랐다.
“정확히 10번을 승진하니까 사장 자리에 오르더라고요. 대졸 신입사원이 처음 다는 게 대리에요. 대리 다음 과장대리, 과장, 차장, 부장, 이사, 상무, 전무, 부사장, 사장 이 순서대로 하죠. 한 번도 쉬지 않고 10번 걸렸어요. 항상 남들이 3년 걸리는 것 2년 걸리고… 빠른 편이었죠.”
-계속 성장 가도를 달렸는데 슬럼프는 없었나.
“영업직을 하면서는 어딜 가나 1등이었고, 계속 ‘잘한다. 잘한다’ 하니까 힘든 일은 크게 없었어요. 하지만 사장직에 오른 후에는 힘든 일이 많이 생기더라고요. 왜곡된 언론 보도가 나왔을 때가 가장 힘들었어요. 기자들이 사실관계도 제대로 확인하지 않고 기사를 마구 내는데, 그런 것들이 기업에는 굉장히 큰 피해가 되죠. 나중에 정정보도가 나오더라도 사람들에게 이미 박힌 안좋은 이미지는 쉽게 사라지지 않으니까요. 당시에는 정말 속상해서 언론중재위원회에 가서 따질 정도 였어요.”
-그럴 땐 어떻게 극복하나.
“‘월요일’ 이라는 동시가 있어요. 만약 월요일이 없다면… 화수목금토일 얼마나 좋을까?(웃음) 모든 직장인들이 가장 끔찍해 하는 게 월요일이잖아요. 하지만 월요일이 없으면 화요일도 없죠. 슬럼프도 그런 것 같아요. 안 좋을 때가 없다면, 좋을 때도 없을 거에요. 그렇게 생각하고 오히려 일에 몰두하면서 잊는 것 같아요. 끙끙댄다고 그 짐을 남이 대신 짊어져줄 수 있는 것도 아니고요.”
-녹십자는 간염·신종플루 백신 개발 등을 통한 사회 공헌 활동도 활발히 진행하고 있다.
“2009년 신종플루 때 대한민국 전체가 패닉상태에 빠졌었죠. 세계적인 바이러스가 퍼졌는데 백신이 없었으니까요. 그 당시 정부 고위책임자가 백신을 구하기 위해 출국하는 장면이 뉴스로 중계됐었어요. 그런데 한 톨도 못 구해왔었죠. 어느 국가가 자국민들에게 먼저 백신을 공급하지 않고 외국에 수출하겠어요. 제일 먼저 보호해야 하는 건 자국민인데 말이에요. 그때 녹십자에서 한국 최초로 신종플루 백신을 생산해냈어요.”
-당시 신종플루 백신을 개발한 시기가 기적처럼 들어맞았다.
“1920년대에 스페인 독감이 유행한 이후 질병 사이클상 올 때가 됐다고 많은 학자가 예측을 했었어요. 우리나라에도 신종플루 같은 병에 대한 자체 백신이 필요하다고 2004년부터 투자를 했었는데, 딱 2009년에 들어맞았던 거죠.”
-30년 넘게 녹십자에서만 일하고 있다. 다른 기업에서 스카우트제의는 없었나.
“음… 사실 딱 한 번 있었어요. 그때가 저와 함께 부사장으로 같이 승진했던 선배가 사장에 올랐던 때였어요. 그분이 5년 선배기도 하니 당연히 먼저 사장을 하는 것이 라고는 생각했지만, 어떻게 사람 마음이 생각대로 되겠어요. 머리로는 당연하다고 이해하는데, 속으로는 내심 서운했죠. 그런데 그때 어디선가 연락이 왔어요. 사장직을 제안하며 유혹했죠. 단칼에 거절했어요. ‘나는 결국에는 녹십자 사장을 할 사람이다. 그러기 위해 여기까지 왔다’고 말했죠. 결국 이렇게 사장 됐잖아요.(웃음)”
-사장이 돼서 달라진 점이 있다면.
“차원이 다르죠. 회사 전체를 생각해야 하니까요. 전체를 잘 굴러가게 어느 한 곳도 소흘해서는 안돼요. 젊은 친구들과 소통하기 위해서 개그 콘서트도 보고, 카카오톡도 열심히 하고 있죠.(웃음)”
-녹십자는 어떤 기업이라고 생각 하나.
“저는 항상 담배회사인 필립모리스와 녹십자를 비교해요. 필립모리스의 2011년 매출이 763억불이에요. 녹십자의 경우 6억 5천만불정도 되니, 우리 회사의 한 100배 되죠. 그런데 필립모리스가 그만큼의 매출을 내며 사회에 전가시킨 의료비용이 무려 2600억불 정도라고 평가돼요. 그런데, 녹십자는 매출 이상의 사회적 공헌을 하고 있죠. 어느 기업이 좋은 기업일까요?”
-제약업을 하는 사람으로서 꼭 개발하고 싶은 약이 있다면.
“치매 예방약과 치료약이요. 우리 회사뿐 아니라 인류가 해결해야 할 숙원 사업이죠. 녹십자에서 먼저 만들어야겠죠?(웃음)”

 

 

 


 

 

 

조순태 사장이 말하는 ‘녹십자 정신’

창의도전
“돈이 되느냐 마느냐를 따지기 보다 꼭 필요한 의약품을 만들어 왔다. 녹십자의 여러 제품에 ‘세계 최초’, ‘세계에서 두 번째’ 등의 수식어가 붙은 것은 이러한 정신이 밑바탕 되었기 때문이다.”

봉사배려
“제약업은 봉사정신을 기본 바탕으로 해야 하는 업종이다. 시장성이 없는 제품에도 눈을 기울이고 그것으로 고통받는 환자들에게 삶의 희망을 준 것은 녹십자의 모든 구성원의 보람이다.”

정도투명
“바른 길이 아니면 가지 않고, 눈 앞에 이익이 있어도 바른 것이 아니면 취하지 않는다는 것이 녹십자의 일관된 정신이다. 일시적으로는 힘들지만 결국에는 올바른 것이 승리한다는 것이 핵심이다.”

인간존중
“녹십자는 생명에 대한 외경과 함께 모든 이해관계 당사자들에 대한 의무도 잊지 않겠다는 의미다. 지역사회를 포함해 고객과 직원, 주주에 대한 의무 등 어느하나 소흘이 하지 않는 것이 녹십자다움이다.”

 

당신에게 중앙대란?
“세상에 태어나서 바꿀 수 없는 게 세 가지 있다. 성씨, 혈연 그리고 내가 중앙대 출신이라는 것도 그렇다. 중앙대는 ‘모교’라는 말에서 느낄 수 있듯 항상 어머니의 품 속 같은 푸근한 느낌을 준다. 학문이나 인생관을 완성한 곳이 아니라 ‘어떻게 살아야 옳은 삶인가?’에 대한 고민을 하게 해준 곳이다. 지금 내가 하는 모든 결정의 바탕은 학창시절의 배움을 기초로 한다.”

 

▲ 조순태 사장은 직원들에게 하던 이야기를 매일 똑같이 할 수는 없기 때문에 늘 새로운 책을 읽는다고 말한다.

 

 

 

 

 

 

 

 

 

녹십자에서의 31년

1981 녹십자 입사
1985 녹십자 영업기획부 대리
1987 녹십자 인천 소장
1990 녹십자 광주 지점장
1997 녹십자 일반의약사업 본부장(이사)
1998 녹십자 병원사업 본부장
1998 녹십자 상무
2002 녹십자 PBM 전무
2004 녹십자 부사장
2009 녹십자 대표이사 사장

▲ 조순태 사장이 부하 직원에게 전달사항을 전해듣고 있다.

 


 

 

 

 

 

 

 

 

녹십자의 신종플루 백신 개발은 우연이 아니었다


사람마다 갈 길이 다르듯이 제약회사도 회사마다 만드는 약이 다르다. 녹십자의 주력 제품은 혈액에서 성분을 추출해 만든 혈액제제와 질병 예방용 백신이다. 약국에서보다 병원에서 녹십자의 약을 찾기 쉬운 것도 이 때문이다.
조순태 사장은 매출이 쉽게 날 수 있는 복제약을 판매하는 대신 녹십자의 약을 개발하는 것이 ‘녹십자다움’이라고 말한다. 많은 제약회사가 복제약에 의존해 수익을 내는 반면 녹십자는 직접 개발한 약으로 수익을 내고 세계적 경쟁력도 갖추고 있다. 쉬운 길을 옆에 두고 실패가 많은 신약개발의 길을 가기는 쉽지 않았을 터. 하지만 그는 녹십자만의 약을 만들어야 한다는 신념에 의문을 품어본 적이 없다. 그 결과 제약회사의 자존심을 지켜냈을 뿐 아니라 유니세프, WHO 등 세계 기구에서도 인정할 만한 약을 만들어 세계적 경쟁력을 갖춘 회사로 인정받기에 이른다.
이러한 조순태 사장의 녹십자 정신은 간염백신 개발에 성공한 1983년으로 거슬러 올라가 간염백신 개발에 성공한 것에서 빛을 발한다. 당시 47달러에 백신을 팔던 외국 제약사는 녹십자의 백신 개발로 같은 백신의 가격을 7달러로 낮춰야 했다. 녹십자 덕분에 내려간 백신 가격은 전 국민 예방접종을 가능하게 했고, 13% 정도였던 간염보균자율을 몇 년 새 7% 이하로 떨어뜨렸다.
녹십자의 활약은 계속되었다. 2009년 신종플루의 등장으로 전국이 공포로 휩싸였을 땐 혜성같이 신종플루 백신을 개발해냈다. 국내 최초이자 세계 8번째 백신이었다. 잡히지 않을 것 같았던 신종플루는 금세 녹십자의 백신에 굴복했고, 녹십자는 보건 안보의 마지노선을 지켜냈다. 조순태 사장은 ‘백신 개발은 하늘이 내려준 선물’이라고 말했지만 하늘은 준비된 자를 돕는다고 했던가. 녹십자의 백신 개발은 우연이 아니었다. 미래를 내다보는 눈과 녹십자 정신의 실천으로 2005년부터 백신 개발을 시작해온 것이다. 부단한 노력으로 ‘국민건강 파수꾼’이 된 녹십자가 ‘인류건강 파수꾼’이 될 그 날을 기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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