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르쿠스 슈타인 교수의 겉모습은 독일인이다. 국적도, 생김새도, 직업도 어느 하나 독일과 관련되지 않은 것이 없다. 그래서 학생들은 처음 그를 만난 순간 덜컥 겁을 먹고 만다. “Hi”로 인사해야 할지, “Guten Tag”이라고 말해야 할지 학생들은 헷갈린다. 그런데 그런 그의 입에서 나온 첫마디는 “어서와요”였다. 인터뷰는 그가 즐겨 찾는 이태원에 위치한 독일 빵집에서 이뤄졌다. 독일 사람들이 가득한 빵집에서 그는 유창한 한국어를 구사하며 인터뷰를 이어갔다. 

글 진민섭 기자 mseob2@cauon.net 강나라 기자 jiangnala@cauon.net
사진 강나라 기자

 

▲ 마르쿠스 슈타인 교수.

 

Marcus Stein(55)
중앙대 유럽문화학부 독일어문학전공 부교수. 독일 빌레펠트 대학에서 언어학 석사학위를 받았다. 이후 헝가리 데브레첸 대학에서 강사생활을 하다 터키로 건너가 통역가로 일했다. 1997년 한국으로 건너와 지금까지 중앙대에서 독일어 회화, 독일 언어학을 강의하고 있다.

 


-어떻게 한국에 오게 됐나?
“제가 한국에 오게 될 거라는 건 저도 상상을 못했어요. 사실 동아시아 국가에는 큰 관심이 없었거든요. 독일에서 언어학을 전공해서 헝가리에서 독일어를 가르쳤었어요. 그러다 독일에서 같이 공부하던 친구가 한국에 와보지 않겠느냐고 제안해서 오게 됐죠.”
-아시아에 대한 편견이 있었나?
“그런 셈이죠. 아시아인들은 모두 마음을 드러내지 않는다고 생각했어요. 독일에 오는 관광객을 보면 아시아인들은 대부분 우르르 몰려 사진을 찍고 금방 떠나버려요. 그 나라의 문화는 즐기지 않고 자기네들끼리만 뭉쳐 다녀요. 저는 여행을 가더라도 그 나라의 삶에 참여해 문화를 느끼는 것을 중요시했었거든요. 처음 올 때는 1년만 있다가 가려고 했어요.”
-그런데 벌써 한국에 온 지 15년째다.
“막상 한국에 오니까 제가 편견에 쌓여 있었다는 걸 알았죠. 아시아인들은 감정을 표현할 줄 모른다고 생각했는데 절대 그런 건 아니더라고요. 한국에 온 지 6개월쯤 됐을 때는 1년 정도 더 있을 수도 있겠다 싶었는데, 1년 지나니 2~3년 더 있자, 또 지나서 몇 년 더. 그렇다보니 이렇게 눌러앉게 됐네요.(웃음)”
-가족들이 걱정하지는 않았나.
“원래 가족들이 걱정을 하지는 않았는데 작년에 일본 후쿠시마 원전사고 때 이메일을 많이 받았어요. 동생이 빨리 휴가 내고 들어오라고 난리였죠. 그래서 저도 나름대로 정보를 찾아 한국은 안전하다고 말했어요. 방사능은 다 동쪽으로 가는 거니까 오히려 유럽에 피해가 크다고.(웃음)”
-독일어를 가르치는 게 꿈이었던 건가?
“어렸을 때부터 독일어 선생님을 꿈꿨던 건 아니에요. 원래 첼로 연주를 했었어요. 음악선생님이 될까 생각도 해봤지만 독일에서 음악선생님의 대우는 굉장히 좋지 않아요. 음악은 고등학교 졸업시험에 나오는 과목이 아니거든요. 음악을 그렇게 잘하지도 못했고요. 그래도 취미로 첼로 연주는 꾸준히 하고 있어요. 얼마 전 루바토(서울캠 오케스트라 동아리) 공연도 같이 했어요.”
-15년 전이면 한국에 IMF가 일어났을 때 아닌가.
“제가 한국에 오자마자 IMF가 일어났죠. 환율이 계속 올랐어요. 한국에서 받은 월급을 독일로 부치면 푼돈이 돼버렸어요. 1년만 있다 돌아갈 생각이었으니까 독일에 아직 집이 있었거든요. 독일에 있는 집에 렌트비를 부치고 나면 월급의 대부분이 빠져나가서 너무 힘들었어요. 그래서 낮에는 중앙대에서, 밤에는 연세대 어학당에서 강의했어요.”
-당시에는 한국말을 하나도 몰랐을 텐데. 어려움은 없었나.
“처음엔 정말 어려웠죠. 우선 음식점에 가면 메뉴판을 하나도 읽을 수가 없었어요. 매번 사전을 찾아볼 수도 없고요. 그래도 한글은 비교적 배우기 쉬운 편이라서 한국에 오자마자 하루 공부했더니 웬만큼 읽을 수 있게 되더라고요.”
-하루 만에? 말도 안 된다.
“읽을 수는 있는데 주문할 땐 30분 정도 걸렸어요.(웃음)”
-한국어 학원에 다니지는 않았나?
“학원에 특별히 다닐 시간은 없었어요. 독학하는데 쉽지 않더라고요. 먼저 사전이 형편없었어요. 예를 들어 ‘동네’라는 단어를 몰라서 검색하면 ‘시골’이라는 뜻이라고 나와요. 우리가 지금 앉아있는 동네가 시골은 아니잖아요?(웃음) 또 ‘고등어’를 찾아보니까 ‘참치’라고 나오더라고요. 그때는 그 뜻이 뭔지도 모르니까 시행착오를 많이 겪었죠.”
-기억나는 실수담이 있나?
“3주 동안 여관살이를 한 적이 있었어요. 지금 생각하면 재미있는 일인데 그때는 꽤 심각했죠.”
-재밌는 에피소드 같다. 자세히 듣고 싶다.
“학교 근처에 살 때였어요. 집주인이 돈이 부족했는지 대출을 받아야 했나 봐요. 그런데 당시 그 집이 불법 개조된 집이었던 거예요. 합법적으로 대출을 받으려면 베란다 공사를 해야 한다고 집을 하루만 비워달라고 하더라고요. 그래서 하루 방을 비우고 밤늦게 집에 돌아가니 집에 벽이 없어졌더라고요.(웃음) 황당했죠. 한국어도 제대로 못 하니까 모텔이나 여관을 가는 방법도 몰랐어요. 겨우 동료 교수님에게 연락해서 여관방을 잡았죠. 하루 이틀이면 될 줄 알았는데 그렇게 3주를 살았어요.”
-힘들었겠다. 그렇게 부당한 일을 당했을 때 도움을 청할 곳이 없었나.
“그때는 국제교류팀에서 외국인 교수들을 담당했어요. 국제교류팀의 직원이 주인하고 말을 했는데 이야기가 안 통하더라고요. ‘그럼 우리가 공사장을 아예 찾아가자’해서 공사장 아저씨랑 담판을 짓기로 했죠. 결국 공사장 아저씨 딸의 집에 가서 제가 살았어요. 그 딸이 우리 집에 살기로 하고요. 아무 잘못도 없는 사람의 딸 집에 가서 살게 된 거죠.(웃음)”
-독일에서는 이런 경우 어떻게 하나?
“독일에서는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이죠. 집 계약에 문제가 생긴다면 주인이 여관값 등을 모두 보상해줘야 돼요. 저는 이미 주인에게 돈을 지불했으니까요. 그런데 한국에서는 협상을 하려고 하죠. 어물쩡 ‘이해해줘~’하며 넘어가려고 하는데 그럼 저는 누가 이해해 주나요?”
-지금도 집주인하고 사이 안 좋다고 들었다.
“맞아요.(웃음) 비슷한 경우에요. 그런데 이제 한국말을 잘하니까 큰 문제는 없어요.”
강의실 밖에서는 한국살이 왕초보 외국인이었지만 강의실에서는 철저한 완벽주의자 교수님이었다. 그는 수업을 시작하기 전 매번 책상을 원형으로 바꾼다. 언어수업은 학생들끼리 ‘대화’를 하는 것이 중요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수업 전 PPT 준비는 필수. 그림, 글씨, 소리를 다 맞추어서 준비하는 것도 슈타인 교수의 철저한 수업 준비 방식 중 하나다. 여간 손이 많이 가는 게 아니다. 슈타인 교수의 수업은 강의실에서만 이루어지지 않는다. 슈타인과 술자리를 갖는 ‘슈탐티쉬(Stammtisch)’라는 시간은 독일어문학전공 학생들이라면 한번쯤 참여하는 행사다.
-PPT 등 수업준비를 굉장히 열심히 하신다고 들었다. 완벽주의자인가?
“선생이라는 자리에 있으면 완벽주의자가 될 수밖에 없어요. 수업준비가 조금만 부족해도 학생들은 바로 알아차려요. 불평하지는 않지만 분위기가 이상해지는 것을 저도 금방 느끼거든요. 그렇게 되면 기분이 안 좋아요. 누가 나를 가르치러 왔는데 제대로 준비가 안 돼있다고 느끼면 기분 나쁜 건 당연하죠. 그런 존재가 되고 싶지는 않아요.”
-수업하면서 힘든 점은 없나.
“언어수업은 아무리 많아도 20명 이하여야 해요. 그 이상이면 수업을 진행하기가 힘들어요. 그러나 한국의 대부분 대학교는 3~40명 꽉 채워서 수업을 진행하고 있어요. 그리고 언어강의 전용 강의실이 필요해요. 매번 수업 전에 책상을 원형으로 옮기는 것도 힘들고 어떤 강의실은 책상을 옮기지 못하게 돼 있더라고요.”
-슈탐티쉬는 언제 시작했나.
“중앙대에 처음 왔을 때부터 했어요. 이것도 우여곡절이 있었어요. 조교들에게 학생들과 친해지려면 어떻게 해야 하느냐고 물으니 학생들하고 커피나 한잔하며 이야기하는 건 어떠냐고 하더라고요. 그런데 결과는 대실패였어요. 몇 명 안온 자리에 말은 안통하지, 분위기는 썰렁하지.(웃음) 이후에 보니까 학생들이 술을 좋아하더라고요. 그래서 다음부터 술을 마시는 자리로 바꿨는데 역시 알코올이 들어가니까 이야기가 통하더라고요.”
-슈탐티쉬가 슈타인(stein)과 디쉬(tish)을 합친 단어라고 들었다.
“학생들이 다 오해하는데 그건 아니에요. Steintish가 아니라 Stammtisch(단골손님들의 식탁)라는 단어에요.”
-학생들을 다 사주시려면 힘드시겠다.
“아이고. 이제는 다 못 사줘요. 작년까지는 제가 다 샀는데 요즘엔 물가가 너무 올라서 힘들어요. 한 달에 한두 번 이렇게 사주다 보면 거지꼴을 못 면하겠다 싶더라고요. 이제 만원씩 걷어요.(웃음)”
-MT 같은 행사가 있으면 꼭 빠지지 않으신다고 들었다.
“꼭 가려고 해요. 이번 MT 때는 일이 있어서 12시 넘어서 도착했어요. 그리고 밤새서 놀았어요.”
-학생들도 학생들이지만 교수님도 술을 굉장히 좋아하는 것 같다.
“술 좋아해요. 독일인이니까 당연히 맥주를 좋아하죠.”
-한국 맥주는 어떤가?
“한국 맥주는 맛없어요. 음료수 같아요. 그래도 그 중에서 M맥주를 가장 좋아해요. 중앙대 독어독문학과 출신 학생이 독일의 맥주 전문대학에서 공부하고 와서 H사 M맥주 개발에 참여했어요. 요즘엔 M맥주만 마셔요.”
-주량은 어떻게 되나.
“한국에 와서 취해본 적은 없어요.(웃음) 저랑 마시면 사람들이 다 먼저 죽더라고요. 그래도 요즘엔 조심해요. 나이는 속일 수 없는지 다음날이 너무 힘들거든요. 그래도 마실 땐 안 취하니까 계속 먹게 돼요.”
-독일식 아침 식사를 학생들에게 준비해준 적도 있다고 들었는데.
“대개 독일인들은 빵, 치즈, 햄으로 아침식사를 해요. 학생들을 초대해서 행사를 열었어요. 이것도 거의 100만원 정도는 들었던 것 같아요. 부담이 커서 지금은 하기 힘들어요. 많이 아쉽죠.”
-학생들과의 소통을 중요하게 생각하시는 것 같다.
“맞아요. 언어를 가르치기 때문에 특히 학생들과의 소통이 중요하거든요. 요즘엔 페이스북을 열심히 해요. 학생들에게 직접 ‘요즘 관심 있는 게 뭐야?’라고 물어보면 대답을 잘 안하잖아요. 페이스북으로 학생들은 무슨 생각을 하는지 구경도 하고 댓글도 달면 재밌어요.”
마르쿠스 슈타인 교수는 단연 독일어문학전공의 스타다. 그의 수업을 들었던 한 여학생은 그의 패션감각에 감탄하며 ‘독문과의 미친 존재감’이라고 표현했다.
-패션에 신경을 많이 쓰는 편인가?
“그런 것 같아요.(웃음) 이왕 옷 사는 거 예쁜 걸 사면 좋잖아요. 또 한국사람들은 ‘옷 잘입는다’는 칭찬을 아끼지 않으니까 재밌기도 하고요.”
-독일에서는 패션에 별로 신경을 안 쓰나.
“독일에서는 꾸미고 가면 ‘오늘 왜 이렇게 꾸몄어?’라며 비웃어요. 독일 사람들은 무조건 싼 옷을 사요. 그래서 한국에 처음 왔을 때는 제대로 된 양복 하나 없었어요.”
-옷도 잘 입고 동안이라서 여학생들에게 특히 인기가 많은 것 같다. 동안의 비결이라도 있나.
“크림?(웃음) 원래 정말 아무것도 안하다가 예전에 여자친구가 크림이라도 바르라고 해서 그 이후로 크림만 발라요. 원래 어려 보였던 것 같아요. 독일에서는 16살부터 술을 마실 수 있어요. 저는 15살 때 술을 먹기 시작했는데 저랑 가면 술집주인이 꼭 ‘너는 몇 살이야?’라고 물어봐서 친구들에게 미안했죠.(웃음)”
-여자친구가 있나?
“작년에 한국인 여자친구가 있었는데 헤어졌어요.”
-왜 헤어졌나.
“저는 공부도 많이 해야 하고 집에서도 일해야 하는데 여자친구는 이해를 못 하더라고요. 문화적 차이는 오히려 못 느꼈는데 직업이 달라서 그랬던 것 같아요.”
-결혼 생각은 없나?
“꼭 결혼을 해야 한다고 생각하지 않아요. 독일엔 결혼을 안 하는 사람이 많아요. 제가 동생 3명 누나 1명이 있는데 결혼 한 사람은 한 명도 없어요. 68혁명(1968년 5월 프랑스에서 일어난 권위주의와 보수체제에 항거하는 국제적 문화 운동) 세대는 아니지만 68혁명 이후로 독일인들의 결혼에 대한 생각이 많이 바뀌었어요.”
-혼자 살면서 식사는 어떻게 해결하나.
“아침은 대부분 빵을 먹어요. 점심은 참마루에서 먹고 저녁도 거의 빵을 사먹어요. 제가 한번 김치찌개를 집에서 만들어봤는데 도저히 못 먹겠더라고요.”
-15년 전 중앙대에 온 후 한 번도 자리를 옮기지 않은 이유가 있나.
“물론 중앙대 독어독문학과가 좋아서죠. 그런데 학교를 옮기는 것도 쉽지는 않아요. 독일어문학전공이 큰 과는 아니기 때문에 다른 학교에 있는 교수님들을 다 알아요. 만약 옮긴다면 지금 우리 학교의 교수님들, 옮길 학교의 교수님들 모두 동의해야 해요. 그런데 내가 잘하는 교수라면 다른 학교에서 훔쳐가는 셈이 될 테고, 못하는 교수라면 당연히 안 받아주죠. 잘하는 교수라서 안 보내주는 거겠죠?(웃음)”
-지금은 정교수인가?
“부교수인데 외국인 별정직 교수에요. 2년 마다 재계약을 해요.”
-그럼 계약을 연장하지 못할 수도 있는데 불안하지는 않은가.
“물론 불안하죠. 학교에서 외국인교수를 필요로 하지 않게 될 수도 있고. 강의평가가 잘 안 나올 수도 있을 테고, 이제 나이도 있어서 다른 학교에서 잘 받아주지도 않을 테니까요. 그래도 언제 일어날지 모르는 일이기 때문에 생각하지 않으려고 해요.”
-독일이 그립지는 않나?
“독일에서 떠난 지 너무 오래돼서 이제 독일에 가면 오히려 어색해요. 1년에 한번씩 가는 것만으로 충분한 것 같아요. 학생들이 ‘외롭지 않으세요?’라고 많이 물어봐요. 그러면 저는 ‘너희들이 있잖아~’라고 말해요.(웃음) 정말 외롭지 않아요. 바빠서 그럴 틈도 없고요.”

▲ 인터뷰 도중 단어가 생각이 안 나자 스마트폰 검색으로 단어 뜻을 찾아보는 슈타인 교수. 오른쪽은 이현선 기자.

 

▲ 스승의 날에 독일어문학전공 학생들이 슈타인 교수에게 선물한 롤링페이퍼. 그의 연구실 한쪽 벽면에 붙어 있다.

슈타인 교수는 여름방학에 뭘 할까?
슈타인 교수는 7월 한 달 동안 독일에 간다. 그의 가족들은 모두 베를린에 산다. 1년에 한  번 있는 독일행이지만 마냥 달콤한 휴가를 즐길 순 없다. 독일에 가서도 다음 학기 강의계획서를 작성해야 한다. 학생들의 장바구니 신청이 끝나면 수업 일정 조율도 해야 한다.
그가 독일에 가는 이유가 가족들만을 보기 위해서는 아니다. 독일의 최신 이슈를 알아보고 직접 체험해 학생들에게 전달하기 위한 목적도 있다. 누군가 슈타인 교수에게 “요즘 독일 경제가 어렵다면서요?”라고 물으면 해줄 말이 없단다. 그가 한국에 온 지는 올해로 15년째. 독일 사람이지만 그는 독일 사정을 잘 모른다. 독일에 가는 일은 그에겐 의무이자 필수다. “독일 신문을 보면 되지 않냐”는 질문에 그는 “신문만으로는 아무 것도 느낄 수 없다”고 표현한다. 직접 사람들을 만나고 이야기를 나눠봐야 학생들에게 그대로 전해줄 수 있다는 것.
하지만 독일에 가서 그가 만나는 사람은 절반이 한국인이다. 한국 제자들과의 만남이 잦기 때문이다. 프랑크푸르트로 교환학생을 간 학생들을 격려하려 한국 학생들과 술 약속도 미리 잡아 놨다.
8월에는 다시 한국에 들어온다. 슈타인 교수의 8월은 아동 책을 보는 달이다. 다음 학기에 대학원에서 아동 문학에 대해 강의할 예정이기 때문이다. 강의준비는 말할 것도 없다. 그의 여름방학은 ‘중앙대 학생들만큼이나 바쁘고 알찰’ 계획이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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