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생각보다 무식하지 않거든요”라고 무용학과 남학생은 하소연했다. 기자는 속으로 생각했다. ‘너네가 똑똑하다고?’ 예술대 학생들을 대상으로 하는 공통교양 과목 수강신청을 성공해 학점은 따 놓은 당상이라며 좋아하던 인문대 친구가 떠올랐다. 친구의 말에 맞장구를 쳐주다 중요한 모순이 있다는 것을 깨닫는다. 바로 기자도 예대생이다. 누워서 침 뱉은 격이 아닐 수 없다.

  매주 ‘예대생의 속사정’이라는 인터뷰 기사를 쓰고 있다. 기자가 예대생이기 때문에 다른 예대생을 잘 안다고 자부했다. 하지만 종종 예술에 대한 기자의 무지를 깨닫는데 요즘 들어 그 수가 빈번하다. 이를테면 얼마 전에 만난 국악대 학생회장의 질문이 그렇다. “너 거문고가 몇 줄인지 아냐?” 더듬거리며 여덟 개를 외친 기자에게 학생회장이 냉정하게 한마디 한다. “빙신” 그제야 여덟 개가 거문고 줄 수인지 문어 다리 개수인지 생각해 본다. 예대생들은 잘 모르겠고 확실한건 기자는 생각만큼 무식한가 보다. 
 

  어려서부터 국영수를 잘하는 남동생과 예체능을 잘하는 기자는 서로 다른 평가를 받았다. 사람마다 지향하는 분야가 다른 데 모두에게 국영수를 강요하니 그외에 것은 부수적인 것이 된다. 그들에게는 거문고가 몇 줄인지 보다 거문고를 영어로 쓸 수 있는게 더 중요할 수 있다. 자신만의 기준을 가지고 예대생을 평가했기 때문에 예대생은 똑똑하지 않다는 편견이 생긴 것이다. 다양한 지식의 수준을 평가하는 단일한 기준은 없다. 대학에 오기 전까지 기자도 스스로를  똑똑하지 않은 인간이라고 생각했다. 적성을 살려 대학 입시 준비를 하고 대학교에 입학한 후에야 깨달았다. 진짜 똑똑한 것은 잘하는 것을 더 잘하는 사람이었다.
 

  학창시절에 적성검사를 한 경험이 있을 것이다. 적성검사의 정답은 없다. 예대생과 타대 학생의 그래프 모양이 달랐을 뿐 뭐가 더 가치 있는지 규정할 수 없다. 내가 아는 것을 예대생이 모른다고 예대생이 아는 것을 인문대생이 모른다해도 잘못되지 않았다. 오히려 서로 교류하는 계기가 된다. 그런 의미에서 ‘예대생의 속사정’이 예대생이 아닌 타 대 학생들에게 더 흥미를 끄는 기사가 되었으면 좋겠다.
 

  인터뷰를 위해 밤늦은 시각 예술대 건물을 찾는다. 불이 꺼져 있는 예술대는 단 한 곳도 없다. 매일 밤 예술의 혼을 불태우는 그들에게 누가 무식하다 말할 수 있겠는가. 그들의 작업실에 오늘도 조심스레 노크한다. 그래 나도 예대생이다.

저작권자 © 중대신문사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