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60년 4월 19일

중앙대 학생들은 스스로 '의혈중앙'이라 부른다. 여기서 의혈은 1960년 4월 19일 자유와 민주주의를 외치다 쓰러진 선배들의 숭고한 피를 뜻한다. 오는 4월 19일 4.19혁명 기념일을 맞아 그날을 기억하고 혁명의 의미를 되찾고자 한다.

본 기사는 4·19혁명에 참여한 선배들의 증언을 바탕으로 당시 현장을 재구성한 글입니다.

 

의에 죽고 참에 살았다

1960년 4월 19일. 중앙대에서는 어떤 일이 벌어졌나

  4월 캠퍼스엔 따스한 봄날의 생기란 없었다. 독재정권에 우롱당했다는 사실에 패배감과 우울함만이 가득했다. 그리고 며칠 전 마산상고 김주열 학생의 시신이 처참한 모습으로 마산 앞 바다에서 발견됐다. 독재정권에 대한 학생들의 격분은 차올라 조금만 건드리면 곧 터져버릴 지경에 이르렀다.

  중대신문 기자였던 나는 그날도 어김없이 아침 일찍 학교로 향했다. 등굣길, 정문 앞에 학생들이 삼삼오오 모여 웅성거리고 있었다. 동급생 친구에게 다가가 무슨 일이냐 물었다. 그는 전날 석간신문을 보여줬다. “고대 데모대, 깡패단 습격으로 유혈소동”이라는 헤드라인이 눈에 들어왔다. 지난밤 시위를 마치고 귀교하던 고대생들이 정치깡패들에게 무차별 폭행을 당해 수십 명의 사상자가 발생했다는 것이다. 더 이상 두고 볼 수 없었다. 독재정권에 대한 불만은 분노의 감정으로, 민주주의에 대한 열망으로 타올랐다.

  한창 수업 시간이지만 하나 둘씩 모이기 시작했다. 모두들 나와 같은 생각이었다. 몇몇 학생들은 파이퍼홀에 들어가 교수님들께 양해를 구하고 학생들을 이끌고 나왔다. 3교시가 끝난 뒤 운동장으로 집결하라는 방송이 울려퍼졌다. 나는 카메라를 들고 나와 그 현장을 한 장 한 장 필름에 기록했다. 김태년이란 친구는 그날의 상황을 생생하게 기록하겠다며 녹음기를 등에 지고 나왔다.

  정오가 되자 운동장(당시 운동장은 영신관 앞에 있었다)은 이미 학생들로 가득했다. 하지만 정문은 굳게 닫혀 있고 임영신 총장님이 우리를 가로막고 말했다. “사랑하는 아들 딸들아 나가면 다친다”. 이에 학생 대표들은 “3/5부정선거 다시 해야 합니다”, “평화적으로 시위하고 돌아오겠습니다”라며 총장님을 설득했다. 정의감에 불타오르는 우리를 막을 순 없었다. “의에 죽고 참에 산다는 교훈을 명심해주기 바란다”고 말씀하시며 눈물을 머금고 길을 열어주셨다.

  <우리 중대생이 자유당 정권의 폭정을 규탄하는 것은 기성세대의 파렴치한 유산을 물려 받지 않으려는 젊은 세대의 정당한 저항이다. 총칼의 탄압에도 굴하지 않고 감행되어야 할 이 항쟁은 우리 후손에게 민주주의를 말살하려는 광적인 장기집권이 가져다 준 부정과 부패의 무서운 해독을 오염시키지 않으려함에 있다.>

  정외과 유경노가 선언문을 비장하게 읽었다. ‘욕설과 폭행을 일제 자제할 것’이라는 내용의 행동 규약도 낭독했다. 그리고 “민주주의 만세”를 세 번 외쳤다. 흑석동 골짜기가 떠나갈 것만 같았다. 일제히 스크럼을 짠 우리는 ‘의에 죽고 참에 살자’는 플래카드를 앞세우고 교문을 출발했다.

  교문을 나서자마자 수 십명의 경관들이 시위대를 가로막았다. 하지만 고작 수 십명의 경관들이 4000명의 시위대를 막을 순 없었다. 우리는 경찰의 저지를 손쉽게 뚫고 명수대 고개를 넘었다. 한강 인도교에 다다르자 소방차 3대가 물세례를 퍼붓기 시작했다. 하지만 물대포 따위로 이미 불 붙은 우리의 의지를 꺾을 수 없었다.

  가로막은 소방차들을 뚫고 한강 인도교를 건너 용산에 다다랐다. 우리를 본 시민들은 거리로 뛰쳐나와 “힘내라!”고 외치며 환호와 박수로 우리를 격려하고 응원했다. 더 이상 막을 수 없다고 판단한 경찰은 시민들의 합세를 저지하는데만 급급했다. 시위대는 자체적으로 질서를 유지하며 시내를 향해 달려갔다.

  우리는 예정대로 서울역을 지나 미도파(지금의 명동 롯데 영플라자) 앞으로 행진했다. 흑석동에서 출발해 점점 지쳐갔지만 시민들의 박수와 환호에 다시금 힘이 솟아났다. 시민들은 우리들에게 물을 떠다주기도 하고 먹을 것을 던져주기도 했다. 졸업생 선배는 “중앙대학교 만세”를 부르며 기뻐했다.

  시청에 이르자 이미 많은 학생들이 “3?5 부정선거 규탄한다”, “김주열의 사인을 규명하라”고 외치고 있었다.  중·고등학교 학생들도 보였다. 우리를 포함한 시위대는 동대문에서, 남산에서, 그리고 한강대교에서 출발해 국회로 모여들었던 것이다. 오직 자유와 민주주의에 대한 열망 하나로.

  우리는 광화문을 지나 경무대(지금의 청와대)로 향했다. 이미 동국대 학생들과 시민들이 바리케이트를 친 경찰들과 대치하고 있었다. 경찰은 시위대를 향해 최루탄과 물대포를 쏴댔다. 이에 시위대는 돌을 던지고 공사를 위해 가져다 놓은 수도관을 굴리며 바리케이트를 무너뜨렸다.

  경무대 앞은 다른 학교 학생들과 시민들에게 맡기고 중앙대는 안국동, 화신(현 삼성증권건물)을 지나 내무부 앞으로 달려가며 부정과 불의에 대한 저항의 구호를 외쳤다. 동료와 맞잡은 어깨는 단한번도 풀리지 않았다.

  오후 5시. 을지로입구 내무부(현 외환은행 건물) 앞에 도착한 우리는 바닥에 주저앉아 시위를 시작했다. 내무부가 부정선거를 주관했기 때문이다. “내무부 장관 나와 사과하라”는 구호를 외쳤다. 그 와중에 맨 앞에 있던 법학과 김병일, 국문과 홍관옥 학생들은 “평화적으로 데모하고 가겠다”, “우리도 뭐 안 던질테니 쏘지 말라”며 협상에 나섰다. 그렇게 경찰과 10미터 정도를 거리를 두고 평화적인 시위를 계속했다. 웃으며 교가를 부르기도 했다. 어깨동무를 한 채 드러눕기도 했다.

  하지만 이 평화는 어둠이 찾아오면서 곧 악몽으로 변해버렸다. “엎드려라!” 소리가 끝나기 무섭게 ‘탕! 탕!’ 갑자기 사방에서 총알이 날아오기 시작했다. 생각할 겨를도 없이 그대로 엎드렸다. 머리 위로 실탄이 스쳐 지나갔다. 아무리 부조리한 독재정권일지라도 평화적인 시위를 하는 대학생들에게 발포하리라곤 생각조차 하지 못했다.

  엎드려서 잠시 눈을 뜨고 보니 여기저기서 동료들이 피를 흘리며 쓰러졌다. 새까만 교복이 붉은 피로 물들었다. 여기저기서 신음 소리가 들려왔다. 셔터를 누르려는 순간 정신을 온전히 차리기 힘들 정도로 마구 짓밟히고 곤봉으로 두둘겨 맞았다.

  연막탄 사이로 선두에서 ‘의에 죽고 참에 살자’고 적힌 플래카드를 들고 있던 서현무가 보였다. 개머리판에 맞아 쓰러진 그녀는 마구 짓밟힌 채 경관들에게 끌려갔다. 그녀는 머리에 피를 흘리면서도 마지막까지 플래카드를 손에서 놓지 않았다.

  그렇게 그날 해는 저물었다. 고병래(상학 3), 전무영(신문 1), 송규석(정치외교 3), 지영헌(신문 3), 김태년(약학 3) 다섯명의 젊은 목숨과 함께. 며칠 뒤 구타를 당하고 경찰에 끌려간 서현무(법학 3)도 그들의 뒤를 따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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