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신은 지금 설거지를 하기 위해 고무장갑을 꼈다. 고무장갑은 낡은 고시원의 물건답게 빛이 바래 있다. 퐁퐁퐁, 수세미에 세제를 짜서 비비자 꺼끌꺼끌한 거품이 일어난다. 달그락 달그락 거리는 소리와 함께 거품은 대수롭지 않다는 듯 씻겨나간다. 그러면서 당신은 설거지 소리와 미묘하게 어우러지는 소리를 듣는다. 당신은 그 정체를 몰라 미간을 얼마간 좁힌다. 서걱서걱. 당신의 뒤에서 태연하게 들리는 소리에 당신은 문득 부르르 떤다. 서걱서걱. 분명 사과를 깎는 소리다. 당신은 물을 잠근다. 서걱……서걱. 아직 벗지 않은 고무장갑에서 물이 흘러내린다. 당신은 마른 침을 삼킨다. 그리곤 천천히 고개를 돌린다.
그러자 식탁에서 사과를 깎고 있는 그녀의 뒷모습이 보인다. 분명, 죽은 그녀다.

  그녀를 처음으로 본 건 당신이 처음으로 고시원에 들어온 날이었다. 당신은 지방 사립대학에서 행정학을 전공했고 올해 2월에 졸업을 했다. 졸업과 동시에 당신은 학생도 아니고 직장인도 아닌 불분명한 신분이 되었다. 하지만 요즘은 이십대 태반이 백수라고, 당신뿐만 아니라 거의 대부분의 사람이 이렇다고, 당신은 당신을 위로했다. 그리고 당신은 행정고시를 준비하기 위해 자취방에서 나와 학교 앞의 고시원에 들어왔다. 고시원에 들어서서 21만원의 돈을 내밀자 금목걸이를 한 총무가 두툼한 손으로 한 장 한 장 센다. 그러는 동안 당신은 총무가 공부하고 있던 책을 흘깃 본다. 경찰을 준비 중인 것 같다.
 

  43호, 한 평 남짓한 곳에 누워 당신은 당신의 미래를 생각한다. 그리고 당신의 가정을 생각한다. 당신의 아버지는 공업사를 운영 중이다. 어릴 때 누군가 아버지의 직업을 물으면 당신은 어물거렸다. 당신의 아버지 가게에는 밀링, 선반이라고 적혀 있었고 어린 당신은 그 뜻을 잘 몰랐기 때문이다. 게다가 아버지의 손톱에는 항상 기름이 껴 있었고 그걸로 봐서 남들이 부러워하는 직업이 아니라는 것만은 직감적으로 느꼈기 때문이다. 당신의 어머니 또한 공장에 나간다. 하루 종일 서서 우주복 같은 작업복을 입고 반도체를 골라낸다고 한다. 
 

  막막함을 느낀다. 당신은 일어나 대충 책들을 정리하고 옷을 갈아입는다. 방은 그나마 깔끔하다. 왼쪽 벽은 연두색 바탕에 꽃무늬가 새겨져 있다. 하지만 창이 없다. 그야말로 사각(四角)지대의 한 가운데에 당신은 서 있다. 당신은 그 순간 잠시 외로움을 느낀다. 당신이 문을 열자 긴 복도가 나타난다. 깜깜한 개미굴 같다. 당신은 공용 부엌에서 홀로 식사를 한 후 공용 화장실로 향한다. 복도를 걷다보니 당신은 마치 한 마리의 개미가 된 것 같은 기분을 느낀다. 각각의 방에서 흰 개미들이 더듬이를 곤두세워 머리를 정리하고 거울을 보고 공부를 하고 잠을 자는 모습을 상상해 본다.
 

  이런, 화장실에 다다른 당신은 순간 입술을 깨문다. 아랫배가 시큰하다 했더니 빨간 피가 보인다. 당신은 어찌해야 할 바를 모른다. 그러다가 당신은 돌아가서 44호의 문을 두드린다. 처음 보는 여자에게 생리대를 빌려달라고 머리를 긁적이며 말한다. 그녀는 아무 말 없이 생리대를 빌려 준다. 그게 그녀와의 첫 만남이다.
다음 날 아침 당신은 일어난다. 사실 창이 없기 때문에 아침인지는 잘 모른다. 다만 휴대폰 시간이 아침 8시를 나타내고 있기 때문에 당신은 ‘아, 아침이구나.’하고 생각할 뿐이다. 아침을 느끼는 것이 아니라 생각하고 있는 것이다. 일어난 당신은 몸이 찌뿌듯하다. 1인용 침대에 누워 잠결에 몸을 구르다가 벽에 턱, 턱 하고 부딪힌 게 설핏 기억난다. 당신은 기지개를 켠다. 그리고 입을 쩍쩍 다신다. 당신에겐 입을 벌리고 자는 습관이 있다. 그래서인지 입 안이 몹시 말라있다. 당신은 일어나 부엌으로 향한다. 당신은 부엌으로 향하면서 알 수 없는 상실감을 느낀다. 대학을 졸업하기 전까지 당신에겐 항상 ‘소속’이 있었다. 월요일 아침이면 당연히 가야할 곳이 있었고 당연히 만나야 할 사람들이 있었다. 그 어느 누구도 당신과의 마주침을 이상하게 느끼지 않았고, 당신 역시 그랬다. 태양을 중심으로 지구는 돌고 그 와중에 자전을 하고 그래도 어지러움을 느끼지 않고 매주 월요일 아침이 오듯 너무나도 당연한 일이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4학년의 과정을 끝내자 대학은 너무나도 당연하게 당신을 밀어냈다. 당신은 어안이 벙벙했지만 그게 곧 당연한 일임을 깨달았다. 그리고 이제 당신에겐 갈 곳이 없다. 지금 당신이 향하고 있는 곳은 월 21만원의 고시원 부엌.
 

  부엌문을 열자 그녀가 혼자서 밥을 먹고 있다. 당신은 그녀와 눈이 마주치자 눈인사를 한다. 그녀도 당신을 보며 예의상하는 미소를 짓는다. 조리대로 향하며 그녀의 메뉴를 슬쩍 살펴본다. 계란프라이와 김치, 김뿐이다. 사실 당신도 별반 다르지 않다. 계란을 깨뜨려 계란프라이를 한 후, 당신은 그녀와 멀찍이 떨어진 곳에 자리를 잡는다. 부엌에는 조그만 식탁이 두개가 있는데 하나는 지금 그녀가 앉아있는 부엌의 정 가운데에 있고 또 하나는 벽에 붙어 있다. 그 벽에 붙어있는 식탁 앞에는 커다란 창이 있다. 하지만 볼 건 없다. 고시원의 현관이 보일 뿐이고 유리창으로 홀로 밥을 먹고 있는 당신이 어른어른 비칠 뿐이다. 고시원의 아침은 적막하다. 윙윙 냉장고 돌아가는 소리가 나고 가짓수가 얼마 없는 반찬에 젓가락 부딪치는 소리가 날카롭게 들린다. 당신은 푸석푸석 아침밥을 씹는다.
 

  당신이 마저 아침밥을 먹는 동안 그녀는 일어나 자신의 밥그릇을 설거지한다. 그녀가 설거지를 마치자 이번엔 때맞춰 식사를 끝낸 당신이 설거지를 한다. 그러는 동안 그녀는 냉장고에서 무언가를 꺼낸다. 흘끗 보니 사과 한 알이다. 당신은 설거지를 하고 그녀는 뒤에서 서걱거리며 사과를 깎는다. 설거지 소리와 서걱거리는 소리가 묘하게 어우러진다.  “그거 신경 쓰이지 않아요?” 당신은 갑작스런 그녀의 질문에 조금 놀란다. 그리고 지금 이 순간까지 신경 쓰이게 만든 것이 무엇인지를 생각해본다. 그러나, 없다.
“네? 뭐가요?”
“눈앞에……. ‘물을 잠궈 주세요’……. 그거…….”
그제야 선반 손잡이 위에 붙어있던 코팅지가 보인다. 당신은 뭐라 말을 꺼내야할지 몰라 어색하게 웃는다.
“아……, 예…….”
그녀는 사과를 조각낸다.
“뭐 공부 하세요?”
“행정고시요.”
“저는 공무원 준비 중이라서 요새 맞춤법 공부하거든요. 그래서 저렇게 맞춤법이 틀려있으면 자꾸……, 신경이 쓰여서…….”
당신은 잠시 혼란을 느낀다. 다시 한 번 눈으로 읽어본다. 물, 을, 잠, 궈, 주, 세, 요…….
“사과 드세요.”
그녀는 반듯하게 깎은 사과 접시를 내민다. 당신은 그녀와 사과껍질만큼이나 겉도는 이야기를 할 것 같아서 반사적으로 말한다.
“아, 괜찮아요.”
  당신은 고무장갑을 벗고 그녀 혼자 남겨둔 채 부엌을 나온다.
  당신은 얼마 안남은 생활비로 생리대와 콘후레이크와 우유를 산다. 그리곤 방에 틀어박혀 책을 편다. 완벽하게 당신은 당신을 로그오프하기 위해 휴대폰을 꺼둔다. 죽어가는 나방처럼 휴대폰이 부르르 떨며 꺼진다.
며칠 뒤 당신은 세 가지 사실을 알게 된다. 아주 사소한 것들이다. 첫 번째, 고시원은 원래 미치도록 건조하다는 것. 물이 뚝뚝 떨어지도록 수건을 적셔 의자 등받이에 걸어놓아도 다음 날 아침이면 바스라질 것 같이 말라 있곤 했다. 그럴 때마다 당신은 분홍색 꽃잎이 박힌 연두색 벽지를 찬찬히 바라봤는데, 그 모습은 마치 앙상하게 졸아붙은 사과를 연상시키곤 했다. 그리고 당신이 알게 된 두 번째, ‘물을 잠가 주세요.’가 맞는 표현이라는 것. 당신은 이런 걸 배웠던가 잠시 생각해 본다. 제길! 당신은 갑작스레 국어학자들에게 화가 난다. 자기네들끼리 맞는 것, 틀린 것 다 정해놓고 그거 지키면서 살라니! 틀리면 화내고 조롱하고 비웃고 무시하고……! 인생에 있어서 맞춤법 따윈 안 지켜도 된다고! 스물네 살에 대학을 졸업하고 스물일곱 살까진 직장 잡아야 하고 서른 살까진 결혼해서 애를 낳아야 하고 서른다섯 살까진 차를 사야하고 마흔 살까진 집을 사야하고! 이런 인생의 맞춤법쯤은 좀 틀려도 상관없다고! 제길. 하고 당신은 생각하다가 그만둔다.
  그리고 세 번째, 고시원 총무를 뽑는다는 것. 금목걸이를 한 총무가 풀타임으로 하던 일을 밤 타임으로 줄여서 낮 타임을 맡아 번갈아 할 총무를 뽑는 것이었다. 결국 당신은 고시원의 총무를 하게 된다. 총무가 하는 일은 딱히 힘들지 않았고, 공부를 하면서도 고시원 비를 벌 수 있었기 때문에 당신은 선뜻 신청했다. 고시원 주인은 50대 여자였는데 고시원에 자주 오지 않았다. 총무로 뽑힌 후 딱 한 번 얼굴을 봤을 뿐이었다.
“화장실 하루에 한 번은 청소하고, 부엌 좀 지저분하다 싶으면 청소하고, 사람 없는데 불 켜져 있으면 불 끄고, 방 보러 오신 분 있으면 빈 방 보여주면 돼요. 딱히 힘든 일은 없고. 어때요, 괜찮죠?”
  당신은 이제 당신의 방보다도 좁은 데스크에 앉아 있다. 그리고 왼쪽 머리 위엔 CCTV가 당신의 머리를 계속 쏘아보고 있다. 당신은 CCTV의 눈알에 왠지 기가 죽는다. 하지만 당신은 곧 적응을 하고 책을 본다. 당신은 데스크에 앉아서 고시원에 사는 사람들을 보게 된다. 그들과 이야기를 나누진 않지만, 하루 종일 같은 곳에 앉아 있는 당신은 그들의 일상생활을 알게 된다. 13호의 남자는 아침 9시쯤에 도서관으로 향해서 5시쯤 돌아온다. 28호의 여자는 잘 외출을 안 한다. 32호는 변비가 있는지 화장실을 가면 굉장히 오래 있다가 나온다. 8호는 항상 늦게 일어나서 아침은 거르기 일쑤이다…….
  그러다가 당신은 대학 동기로부터 소개팅 제의를 받는다. 졸업과 동시에 취직한 보기 드문 남자라 했다. 전화기 너머로 당신의 친구는 여자 나이 크리스마스케이크라고, 24살이 제일 잘 팔린다고 호들갑을 떤다. 당신은 그 제의를 수락한다. 당신은 너무 신경 쓴 것처럼 보이지 않게, 그렇다고 너무 신경을 안 쓴 것처럼 보이지도 않게 옷을 입는다. 그리고 당신은 의자에 앉아 화장을 하기 시작한다. 오랜만의 화장이라 당신은 설레기까지 한다. 컨실러로 결점을 가린 얼굴에 희디 흰 파우더 가루가 날린다. 눈썹을 꼼꼼히 그리고 화이트 펄 섀도를 눈두덩 전체에 펴 바른다. 금색 펄 섀도를 쌍꺼풀 부위에 덧바르고, 회색 섀도로 포인트를 준다. 마스카라를 쥔 당신의 손놀림은 무척이나 조심스럽다. 눈이 한층 더 또렷하게 느껴진다. 당신은 눈물 화장법을 연출하기 위해 눈 앞머리와 눈 밑에 흰색 펄 섀도를 은은하게 바르고 펄 가루를 살짝 덧바른다. 눈 화장을 마친 후 핑크색 립스틱을 바르며 당신은 어쩐지 만족스럽다고 생각한다.
  당신은 남자 총무와 근무 시간을 바꾸고 약속 장소에 나간다. 그리고 당신을 기다리고 있는 한 남자를 만난다. 당신은 순간 흠칫한다. 그의 볼품없는 외모 때문이다. 당신은 그의 앞자리에 앉는다. 당신은 어색하게 웃으며 인사를 한다. 그도 웃는다. 앞니 두개가 톡 튀어나와 있다. 그의 머리는 삐쳐서 그 머리칼에 손이 찔릴 것만 같고 그 삐친 머리를 가라앉히려고 머리에 젤을 발랐으나 그로 인해 그의 머리는 촉촉한 정도를 지나 기름져 보인다. 그는 키도 작고 어깨도 좁고 일어설 때 보니까 엉덩이도 튀어 나왔다. 말하자면 그는 같이 다니기에 창피한 외모였던 것이다. 그러나 당신은 예의를 다한다.
  당신은 닭 가슴살 도리아를 두어 입 먹은 후에 묻는다.
  “어떻게 대기업에 들어가게 되셨어요? 요새 취직도 힘든데.”
  “에, 다 능력이지요. 핫핫핫.”
  그는 한 번 웃더니 물을 마신다. 당신도 어색하게 따라 웃다가 물을 마신다.
  “사실은 말입니다.”
  그는 목소리를 낮추었다.
  “요즘 같은 시대엔 빽도 다 능력입니다. 핫핫.”
  당신은 화들짝 놀란다.
  “네?”
  “여전히 빽으로 취업하는 경우가 비일비재하다 이겁니다. 대기업인 경우 남들의 시선이 있으니까 채용공고를 내긴 내는데, 이건 다 위장이다 이겁니다. 이미 뽑힐 사람이 정해져 있는 채용공고구요. 그 사람 중에 한 명이 바로 저였다 이겁니다. 핫핫핫.”
  “아니, 하지만 어떻게……?”

 

  “면접관이 저희 아버지시니, 말 다했죠. 핫핫핫. 하지만 어느 정도의 조건을 갖추기는 해야 합니다. 인성테스트도 요리조리 통과해야 하고 학점도 쌔빠지게 관리해야 하고 면접관들 앞에서 입을 요래요래 구워삶으면 끝나는 거죠. 핫핫핫.”
  당신은 할 말을 잃는다.
  “도의적으로 얼굴도 모르는 사람들에게 일말의 미안함을 느끼긴 합니다만, 어차피 인맥 없이는 사회적으로 성공하는 것이 불가능하지 않습니까. 그리고 이런 게 다 사람 사는 세상이기도 하구요. 핫핫핫.”
당신은 최선을 다해 웃는다. 당신의 귀엔 아버지의 공장에서 밀링 선반이 돌아가는 소리가 나는 듯하다.
저녁을 다 한 후, 길을 걸으며 그는 당신의 어깨에 손을 슬쩍 얹는다.
  “혹시 이쪽으로 취업할 생각 있으면 언제든 연락 줘요. 난 그쪽이 맘에 드니까. 핫핫핫.”
  데려다 준다는 그를 부득불 먼저 보내고 당신은 고시원으로 향한다. 당신은 갓 신입사원이 뭘 믿고 저러나 싶기도 하고 괜히 모종의 제의를 받은 것 같아 불쾌하기도 하다. 당신은 피곤하다. 당신의 구두가 지친 소리를 낸다. 고시원 현관에 들어서서 부엌으로 나 있는 창문을 바라보자 그녀가 있다. 그녀는 오늘도 혼자서 사과를 깎아 먹고 있나 보다. 당신은 그녀의 사과가 몇 개나 남아 있을지 갑자기 궁금해진다.
  데스크에 앉아 당신은 공부한다. 당신은 피곤하다. 당신은 크게 기지개를 켠 후 화장실에 세수를 하러 간다. 그 곳에서 당신은 그녀를 만난다. 창이 없는 화장실에 주황색 조명등이 비치고 있다. 그녀는 칸막이에 들어갔고, 당신은 화장실을 나오면서 무심코 불을 끈다. 순식간에 암흑이 찬다.
  “여기 사람 있어요!”
당신은 아차, 싶어 불을 황급히 킨다.
  “아, 죄송해요. 깜박하고…….”
당신은 피곤해서 정신이 없다. 저녁 타임은 12시까지이다. 당신은 데스크에 앉아서 존다. 시간이 되자 당신은 비몽사몽으로 일어나 책을 챙긴다. 복도의 불을 끄자 비상구의 초록불이 멍이 든 것처럼 보인다. 당신은 당신의 방으로 향한다. 당신의 옆방에서 한 줄기 빛이 열리곤 그녀가 나온다. 당신은 두어 걸음 걷다가 좁은 통로에서 그녀와 부딪힌다.
“앗!”
“어머, 죄송해요.”
당신은 말하는 것조차 귀찮아서 괜찮다는 뜻으로, 혹은 자기도 미안하다는 뜻으로 고개를 살짝 끄덕여 인사를 한다. 그러나 어두워서 그녀가 봤을지는 미지수다. 그러나 당신은 상관없다고 생각한다. 당신은 책상 위에 책을 올려놓고 바로 쓰러져 잠이 들기 시작한다.
다음 날 아침 12시. 역시나 당신은 데스크에 앉아 있다. 당신은 행정학 원론을 안 본 어제 하루를 보상받기 위해 오늘 더욱더 뛰어야 한다. 한참 꼬부랑거리는 영어에 헤롱댈 때 대학생 하나가 데스크 앞에서 서성인다.
기숙사에서 떨어지고 자취방은 비싸서 고시원을 알아보는 중이라 했다. 당신은 책상 밑에서 열쇠 꾸러미를 찾는다. 손에 잡힌 열쇠 꾸러미가 은빛 비늘처럼 출렁인다. 비어있는 방을 보여주자 대학생은 놀란다.
“이렇게 좁은 곳에 책상이랑 침대가 다 들어가 있네요.”
“이렇게 좁은 곳에 사람도 산답니다.”
“하하, ‘사는’게 아니라 ‘사용’하고 있는 거겠죠.”
당신은 그 말에 조금 놀란다. 당신은 대학생을 데리고 부엌, 화장실을 보여준다.
“뭐, 생각보단 깨끗하네요. 그래도 좀 더 생각해보고 다시 올게요. 이렇게 좁은 줄 몰랐거든요. 창도 없고.”
당신은 흔쾌히 대답한다.
“네, 그러세요.”
당신은 데스크로 돌아와 열쇠를 제자리에 갖다 놓는다. 그리고 괜히 씁쓸함을 느낀다. 한 평 반 정도 되는 곳은 ‘사는’게 아니라 ‘사용’하고 있는 것뿐이었다. 매일 도서관에 가는 13호의 남자도 그러했고, 외출을 잘 안하는 28호의 여자도, 변비에 걸린 32호도, 늦게 일어나는 8호도, 그리고 당신도 그러했다. 그러다가 당신은 무심코 열쇠 꾸러미를 본다. 당신은 문득 다른 사람들은 그 공간을 어떻게 사용하고 있는지 궁금해진다. 마음만 먹으면 아침에 도서관에 간 13호의 방을 열어볼 수도 있는 일이었다. 당신의 옆방 그녀는 가끔씩 환기를 시킨다고 방문을 조금씩 열어두곤 했다. 그 옆을 지나갈 때마다 당신은 아무런 악의 없는 순수한 호기심으로 슬쩍 슬쩍 엿보기도 했다. 그녀가 없다면 당신은 그녀의 방을 열어 볼 수도 있었다. 그리곤 지금처럼 누가 방 보러 왔다 간 척 묵중한 열쇠꾸러미를 정직하게 내려놓을 수도 있었다. CCTV에서는 열쇠를 가져간 모습과 가져다 놓는 모습만 포착될 테니 말이다. 하지만 당신은 곧 그러한 생각을 그만 두었다. 당신은 그렇게 남 몰래 남의 방을 열어볼 정도로 간 큰 사람이 아니다.
그러나 결국, 다음 날 당신은 그녀의 방을 열어 보았다. 절대 뭔가를 훔칠 생각은 아니었다. 그저 지나친 호기심이었고, 짜릿한 스트레스 풀이였다. 당신은 하루 하루 똑같이 굴러가는 일상에 지쳐 있었고, 지렁이처럼 소름끼치도록 휘날려 있는 글씨가 지긋지긋했고, ‘폭탄’ 소개팅남이 자꾸 다시 만나기를 요청했고, 그가 대기업에 다닌다는 이유만으로 그를 내치지도 못하고 어쩔까 고민하고 있는 자기 자신에게 환멸을 느끼고 있던 탓이었다. 다른 사람들 같으면 딱 담배를 피울 만한 심정이었다. 그러나 당신은 담배를 하지 못하는 사람이다. 당신은 열쇠를 잡아 올렸다. 은빛 비늘들이 짤랑 짤랑 부수어 지는 소리를 낸다.
왜 하필 그녀의 방이었는지 당신은 모른다. 다만, 오랜만에 그녀가 외출하는 모습을 당신은 바라보았고 꽤 단정히 차려입은 걸로 보아 편의점이나 목욕탕에 다녀오는 게 아니라고 생각했을 뿐이었다. 게다가 그녀는 당신의 옆방이었고 -혹여라도 누가 오는 낌새라도 보이면 자기 방인 척 열쇠를 안에 두고 모르고 잠근 척할 수도 있었다. 당신은 당신이 이토록 계산이 빠른 사람이었나를 진저리치게 느낀다. - 고시원생 중 그나마 안면이 있는 사이였기 때문에 이런 짜릿한 장난을 하기에 적합한 상대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녀의 방문을 열자마자 깨끗한 냄새가 흘러나왔다. ‘깨끗한 냄새’라는 게 뭔지 정확히는 잘 모르겠지만 방에 고여 있던 그녀의 체취를 맡자마자 그런 생각이 들었다. 불을 켜자 순식간에 어둠이 달아난다. 그리고 당신은 너무나 깨끗한 방에 압도당한다. 마치 도둑이 침입할 때 현관이 지저분하면 마음이 풀어지고 가지런히 정돈된 구두를 보면 더욱 긴장하는 것과 같은 이치다. 당신은 그저 방을 휘휘 둘러본다. 자잘한 꽃무늬가 수놓아져 있는 이불, 노란색 베개, 갈색 곰 인형, 각을 맞춰 서 있는 책들. 당신은 그 어느 것 하나 건들지 않고 슬그머니 방을 나온다. 문을 다시 잠그고 재빠르게 데스크 앞으로 온다. 데스크 문을 열고서는 당신은 느릿느릿 들어와 태연하게 열쇠를 내려놓는다.
그날 밤, 당신은 부엌에서 물을 마시다가 현관으로 들어서는 그녀를 본다. 그녀의 뒷모습이 지쳐 보인다. 당신은 어쩐지 그녀의 얼굴을 보기가 불편하다. 서둘러 물을 벌컥벌컥 마시고 컵을 헹구고 있는데, 부엌의 문이 스르르 열린다. 뒤돌아보니, 그녀다. 눈이 마주치자 그녀가 인사를 한다. 당신도 싱긋 웃으며 답례를 하지만 역시 불편하다. 부엌을 나가려는 당신을 붙잡고 그녀가 묻는다.
“저기……, 같이 사과 드실래요?”
이 여자는 또 사과타령이다.
“네? 아, 아니요. 사과 별로 안 좋아해요.”
거짓말이다. 사과는 좋아하지만, 그녀와 같이 먹는 사과가 싫을 뿐이다.
“저기……, 그럼 제 이야기 좀 들어주실래요? 오늘…… 좀 하고 싶은 이야기가 있어서.”
아니, 정확히 말하자면 사과가 싫은 게 아니라 사과를 먹으며 그녀와 이야기하는 시간이 싫은 것이다.
“아, 죄송해요. 오늘은 늦었고, 저도 좀 피곤해서. 왜, 급한 일이세요?”
“아……, 아니요. 급한 일은 아니구요……. 괜찮아요. 편히 쉬세요.”
“네에, 다음에 이야기해요. 안녕히 주무세요.”
당신은 서둘러 부엌을 빠져나온다.

“당신이야?”
데스크를 비워두고 2시간정도 목욕을 다녀온 당신은 갑작스레 고시원으로 쳐들어온 주인의 모습에 놀라고, 다짜고짜 묻는 질문에 또 한 번 놀란다.
“네? 뭐가요?”
“당신이 44호 여자분 방에 들어갔었어?”
당신은 심장이 두방망이질치는 소리를 듣는다. 손이 떨린다. 그러나 어금니를 깨문다. 당신이 그 여자의 방에 들어갔다 나오는 걸 본 사람도 없고 봤을 리도 없다. 창이 없으니까! 문을 열지 않는 이상, 복도에 나오지 않는 이상 다른 방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는지 알리가 없다.
“아니요. 저, 안 들어갔어요.”
당신이 그 여자의 방에 들어갔을 때 눈으로 보기만 했을 뿐 그 어떤 것도 건들지 않았음을 떠올리며 침을 꼴깍 삼킨다.
“이상하네. 학생이 CCTV에 열쇠 가져간 게 찍혔길래.”
“그건 대학생이 방 보러 와서 보여주려고 가져간 거예요. 제가 왜 이 여자분 방에 들어가겠어요?”
주인 뒤에서 쭈뼛 서 있는 그녀가 보인다.
“누가 들어갔던 거 확실해요? 그걸 어떻게 알아요?”
“누가 제 침대에 누웠던 것 같아요. 전 항상 침대보를 가지런히 펴놓는데 어제 외출했다가 와서 보니까, 누가 누웠다 일어난 것처럼 침대보가 폭삭 눌려있고…….”
“아니, 침대보 모양까지 다 기억하고 나가세요? 원래 그 모양으로 펴놓으신 건 아니구요?”
“저도 처음엔 그렇게 생각하고 말았는데요……, 오늘 아침에 보니까 제 책도 눕혀져 있고…….”
“책이야 저절로도 잘 쓰러지는 물건이잖아요. 뭘 그런 거 가지고 이렇게 사람을 의심하고 그러세요?”
“아……, 저 기분 나빴다면 죄송해요. 전 그게 아니고 그냥 꺼림칙해서…….”
“말 들어보니까 사람이 들어간 것도 확실한 게 아니네요. 정말 불쾌해요.”
당신은 시선을 주인한테 돌린다.
“전, 정말 안 들어갔어요.”
주인도 그제야 표정이 좀 풀린다.
“그렇지? 설마 그랬겠어. 에휴, 여자 분이 좀 예민했긴 했네.”
당신과 주인은 그녀를 쳐다본다. 그녀는 울상을 짓고 있다.
“그나저나, 지금 근무시간 아니야? 근무시간에 목욕탕을 다녀왔어? 이런 식으로 하면 안 되지. 믿고 맡기는 건데. 2시간 시급 차감이야.”
당신도 울상을 지었다. 그래도 속으론 안도의 한숨을 쉰다. 그 시간 이후 당신은 더욱 그녀를 피해 다닌다.

당신은 며칠 후, 잠을 자다가 그녀의 방에서 들려오는 이상한 소리에 눈을 뜬다. 쿵-쿵- 간헐적으로 벽에 부딪히는 소리다. 아니 일부러 벽을 발로 차는 것 같기도 하다. 당신은 어쩐지 조금은 무서워진다. 무슨 일 있나, 싶지만 당신은 고개를 저었다. 무슨 일이 있을 리 없다. 때때로 당신도 그 좁은 1인용 침대에서 자다가 벽에 부딪힌 적이 있지 않은가. 그녀도 지금 잠결에 벽을 차고 있는 것일 것이다. 그러기엔 뭔가 호흡이 가빠오는 몸부림 같았지만, 당신은 무시한다. 하지만 그 소리가 생각보다 오래 들려온다. 쿵……쿠……우웅……. 잔뜩 신경이 예민해진 당신은 조금은 화가 난다. 그래서 당신은 조용히 하라는 뜻으로 벽을 세게 두드린다.
그리고 그 다음날부터 그녀가 보이지 않는다. 방에는 창이 없으므로 방에만 틀어박혀 있으면 사람이 있는지, 없는지조차 모른다. 단지 고시원은 으레 옆방의 방귀소리도 들리는 법이라서 인기척으로 사람이 있구나, 없구나를 느낄 뿐이다. 그러나 당신은 그녀의 인기척을 단 한 톨도 느끼지 못한다. 벽에다 귀를 가져다 대보았지만 이불 서걱거리는 소리조차 들리지 않는다. 당신은 며칠째 보이지 않는 그녀가 조금은 궁금했지만 그저 집에 갔으려니 했다.
그러다가 어느 틈엔가 역한 냄새가 복도를 맴돈다. 처음엔 음식물 쓰레기라고 여겼다. 그래서 당신은 쓰레기통을 비우기 위해 부엌으로 갔다. 쓰레기통은 비어 있었다. 당신은 코를 킁킁거렸다. 환기를 시킨 후 문을 닫자 냄새는 다시금 복도를 메웠다. 방을 찾는 대학생이 몇 명 왔으나 인상을 쓰며 다시 나갔다. 당신은 어느 정도 예민해져있었다. 시큼하고 구역질이 밀려오는 게 마치 시체 썩는 냄새 같았다. 몇몇 사람들이 항의를 했다. 당신은 죄송하다고 했다. 그런데 그 사람들이 당신의 방 주위 사람들이었다. 당신은 의아했다. 실제로, 복도를 걷다가 당신의 방 가까이 왔을 때 당신은 이윽고 벽을 잡고 헛구역질을 했다. 당신은 당신의 방문을 열었다. 그러나 확실히 당신의 방은 아니었다. 그러면, 그렇다면? 갑자기 당신의 가슴이 벌렁대기 시작한다. 당신은 조심스레 옆방으로가 그녀의 방문을 두드린다. 대답이 없다. 세게 두드렸으나 역시 대답이 없다. 당신은 열쇠 꾸러미를 가지고 온다. 날카롭게 벗겨진 비늘 같다. 당신은 손이 덜덜 떨린다. 자꾸 열쇠 구멍에 열쇠가 헛들어간다. 당신은 침을 꿀떡 삼킨다. 그 소리가 너무 크다.
철컥. 문을 열자 당신은 당신의 코와 입을 틀어쥔다. 시궁창 냄새가 훅 끼쳐온다. 그리고 당신은 보아야 했다. 목에 줄을 매단 채 질질 끌려오는 그녀의 시체를. 그녀의 입가에 침인지 무엇인지 모를 하얀 게 묻어있었으나 미치도록 건조한 고시원 방 안 때문인지 바싹 말라있었다.

그녀는 잠정적 자살로 결론이 났다. 유서는 없었지만 누군가의 침입이 보이지 않는다는 점, 특별히 주위 사람에게 원한을 사지 않았다는 점, 몸에 멍이 들어있긴 하지만 자살할 때의 몸부림으로 추정 등의 이유였다. 유족들은 자살할 이유가 없다며 울부짖었지만 지역 뉴스에서는 취업난의 스트레
스로 자살 이유를 단정 지었다. 아나운서는 담담히 다음 뉴스로 넘어간다.
당신은 안내 데스크에 멍하니 앉아있다. 그리고 그 날의 그 소리를 떠올린다. 그 소리가 자살에 몸부림치던 그 소리였을까. 만일 당신이 그 때 무슨 일 있냐며 노크라도 했더라면 그래서 문을 열었더라면 그녀는 ……죽었을까, 아니면……살았을까. 고시원 주인은 ‘아이고 어째, 아이고 어째’를 연발한다. 그것이 그녀의 죽음에 대한 것인지 아니면 고시원 이미지 추락에 대한 것인지는 알 수 없다.
그녀의 시신이 수습된 후 그녀의 방은 활짝 열려 있다. 더 이상 조그만 틈새로 엿보던 그녀의 방이 아니다. 몰래 문을 따서 들어가 보던 그녀의 방이 이젠 더 이상 아니다. 다리를 벌린 여자처럼 조금은 민망하게 문이 열려 있다.
당신은 애써 그 날의 기억을 지우려 한다. 어쨌든 그녀가 죽은 건 유감이지만 당신의 잘못은 아니다.

그런데 며칠 뒤 고시원 남자 총무가 체포되었다는 소식이 들려온다. 그가 자수를 한 건지 아니면 덜미가 잡힌 건지는 알 수가 없다. 그러나 이 소식은 당신을 비롯한 고시원 사람들에게 가히 충격적인 일로 다가온다. 두툼한 손의 남자 총무는 그녀가 방을 비운 사이 그녀의 방에 들어가곤 했다고 한다. 그녀의 방 안에서 무엇을 했는지는 알 수가 없다. 하지만 당신은 그녀의 침대에 누워보는 총무의 모습이 떠오른다. 그녀의 책을 구경하다가 쓰러뜨리는 총무의 모습도 떠오른다. 그녀의 속옷을 훔쳐보고, 그녀의 거울로 자신의 얼굴을 살펴보는 그런 총무의 모습이 파노라마처럼 펼쳐진다.
그리고 그녀가 죽은 그날 밤에도 총무는 몰래 그녀의 방에 들어갔다고 했다. 그런데 나간 줄 알고 있던 그녀가 잠자고 있자 총무는 당황했고 그녀 역시 인기척에 눈을 떴다가 총무를 발견하고 소리를 지르려했다. 그러나 총무는 순발력이 좋았다. 곧 두툼한 손으로 그녀의 입을 막았고 코도 막았다. 그녀는 발버둥 치다가 결국 숨이 끊어졌다했다. 고시원 사람들은 당신에게 그날 밤 아무 소리도 못 들었냐고 추궁했다. 당신은 엉겁결에 아무 소리도 못 들었다고 말했다.
그럼 그 때, 당신이 들었던 그 소리가, 간헐적으로 쿵…… 쿠웅 들려오던 그 소리가, 필사적으로 살려달라는 몸부림이었단 말인가. 그 소리에 화가 난 당신은 어떻게 행동했는가. 도리어 조용히 하라고 벽을 두들기지 않았던가. 그 소리를 그녀도 들었을까……? 살려달라는 발버둥에 화답으로 돌아온 것이 고작 조용히 하라는 노크였다니! 죽어가면서 마지막으로 들은 소리가 신경질적인 노크였다니!
당신은 다시 한 번 마음을 추스른다. 그녀의 죽음은 유감이지만, 어쨌거나 당신의 잘못은 아니다.

“너무 마음에 담아 두지 마세요. 요컨대, 차라리 귀신이 낸 소리라고 생각한 게 맘 편하겠군요.”
어느새 부쩍 연락을 자주 하게 된 소개팅 남이다.
“?”
“그 여자가 정말로 그렇게 죽어가면서 당신의 노크 소리를 들었다면 얼마나 그쪽을 원망하며 죽어갔겠습니까.”
“! 하, 하지만.”
“하하하, 압니다. 당신 잘못이 아니라구요. 누구라도 그렇게 행동했을 거예요. 누구나요. 나 같았어도 그랬을 거예요. 안 그래요? 그게 사람 사는 세상 아니겠습니까?”
당신은 동의하듯이 고개를 짧게 두 번 끄덕인다. 그리고 한숨을 쉰 후 자그마치 9만 원짜리 스테이크를 썰어 한 입 먹는다.
당신은 행정고시가 너무나 어려운 시험이라 생각한다. 그리고 행정고시는 당신의 적성과 맞지 않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이것 말고 당신이 하고 싶은 게 무엇인지 당신은 알지 못한다. 새로운 것을 시작하기에 당신은 너무 늙은 듯한 느낌이 들고, 모든 것을 포기하기에 너무 이른 듯한 느낌이 든다. 새로운 공부를 하기엔 당신의 집안 사정은 좋지가 않고 하고 싶지 않은 공부를 하며 세월을 죽이기엔 당신은 너무나 젊다. 아직 피부는 사과처럼 탱탱하고 발그레하며 뽀얗다. 당신은 아름답다.
고시원 앞에서 멀어지는 SM7을 바라본다. 아버지가 인사과장이니 큰 잘못을 저지르지 않는 한 앞으로 그는 승승장구할 것이다. 당신은 그와의 결혼생활을 떠올려본다. 아침에는 된장찌개를 끓여주고 오전에는 설거지와 빨래를 끝낸 후 피트니스 클럽에 가서 몸매를 가꾸며 오후엔 백화점에서 쇼핑을 하고 집으로 돌아와 저녁을 준비하면 될 것이다. 나쁘지 않은 삶이었다.
그런데……, 저녁이 되면 보기 좋게 썬 사과를 먹으며 오순도순 담소를 하는 장면도 과연 미래의 삶에 삽입되어 있을까……?
당신은 조금 불안한 마음이 든다.
고시원에 들어와 냉장고 야채실을 열자 여기 저기 멍이 든 사과가 그득 채워져 있다. 죽은 그녀의 사과다. 사과는 이제 푸석푸석할 것이다. 그리고 이젠 더 이상 먹을 사람도 없다. 당신은 사과를 하나하나 끄집어 내 버리기 시작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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