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서배치를 처음 받던 날, 한 선배가 ‘1년이 몇 주인지 혹시 알아요?’ 하고 물었다. 일년은 52주이다. 나는 그 날 처음으로 새삼 ‘1년이 52주밖에 안 되는구나!’ 하고 깨달았다. 대부분의 회사는 기본적으로 월 단위 계획을 수립하고, 실행을 맞추기 위해 노력한다. 하지만 내가 속한 글로벌운영센터라는 곳에서는 주(Week) 단위로 계획을 수립하고, 운영
오늘도 어김없이 사무실 문을 두드리며 상담할 것이 있다는 분들이 찾아오신다. 대부분의 경우 사업장에서 임금을 받지 못해 어떻게 해야 받을 수 있을지 상담하러 오시는 분들이다. 그분들에게 어떻게 해결해야 하는지 절차와 방법을 설명해 드리고 나서 뭔가 풀린 듯 시원해 하시는 표정을 보면 내 기분도 덩달아 좋아지게 된다. 나는 현재 노무법인에서 일하는 공인노무사
요즈음 내가 즐겨 본 라는 미국 드라마에 자주 등장하는 대사이다. 판타지 세계를 배경으로 한 이 드라마에서 북쪽의 영주인 Stark 가문은 항상 겨울을 대비하라는 의미의 가훈을 지니고 있다.회계사에게도 이 가르침은 유효한 것 같다. 특히 감사본부의 회계사는 대한민국 대부분의 기업들이 12월을 결산 월로 하고 있기 때문에 1~
근황부터 밝히자면 귀여운 연하처럼 단풍이 집중을 흐리는 남산 자락 서울시 산하에서 부대끼며 서울시 수돗물 아리수를 벗 삼아 매일 들쭉날쭉한 근무생활을 한다. 새벽에 나가 라디오에 울려 퍼질 내 목소리에 연애하는 설렘을 느끼기도 하고 리포트 준비에 적성이 맞는 건가 짜증을 내기도 한다. 그래도 이 재미난 일을 할 수 있음에 감사하는 터라 종종 부장님께 행복해
새벽 1시, 사건 서면을 마무리 짓는다. 부당해고·차별시정·임금체불 등의 사건들이 연속해서 들어와 정신없이 바쁜 나날들. 학보사를 시작해 군대를 전역하고 나서야 그만두었던 대외활동을 하던 나날들 마냥 나는 오늘도 늦게 잠자리에 든다. 그렇다. 난 오늘도 대학생활의 연장선에서 글을 쓰며 살고 있는 것이다. 다만 그 목적은 다르지만. 학내 커뮤니티나 캠퍼스 안
서울 강북지역에서 40여 년 생활하고 있다. 그중 교단경력 약 37여 년을 지방에서 보낸 터라 기러기 가족을 면치 못했다. 정년퇴임 후엔 늦게나마 가족과 함께해 살맛이 난다. 요즘엔 친목회, 동창회, 세미나 등 특별한 용무를 제외하곤 산책으로 일과를 보낸다. 내가 살고 있는 동네는 강북구와 도봉구가 어우러져 있어 국립 4·19 민주묘지, 애국지사묘역, 보광
직장에 들어온 지 이제 갓 1년이 된 신입사원. 나는 이제 직장인이다. 회사라는 표현이 어색했지만 공무원들도 회사라고 부른다. “우리 회사” 지난 1년은 정말 빨리도 지나갔다. 정해진 시간에 나도 모르게 눈이 떠지고 정해진 시간이 되면 밥을 먹으러 식당으로 발걸음을 옮기기도 한다. 하지만 집에 갈 시간. 누구도 퇴근할 생각을 하지 않는다. 그렇게 오늘도 나
1. 점심시간이다. 식당에 가서 각자 먹고 싶은 메뉴를 종이에 작성하는데 누군가 이런 질문을 한다. “떡만두국이에요, 떡만둣국이에요?” 2. 오후 근무 중, 여러 사람이 회의실에 모여 심각하게 토론을 한다. “임상심리학박사로 할까요? 임상 심리학 박사로 할까요?” “임상 심리학 박사는 전문성이 떨어져 보이니까 임상심리학박사는 어때요?” “임상심리학박사는 가
피곤에 쩔어 오매불방 주말과 월급날만 기다리는 평범한 직장인입니다. 그나마 있는 주말도 반납하기도 합니다. 하지만 분명한건 스스로 선택한 길에서, 가장 잘할 수 있는 일을 하고 있다는 자부심을 가지고 살고 있다는 것입니다. 격세지감에 젖은 선배들의 취업 수기나 다양한 일화들은 수도 없이 볼 테니, 조금 현실적인 이야기를 해주고 싶습니다. 극단적인 어투가 있
정확히 말하자면, ‘아직도’ 나는 새벽 5시에 일어난다. 입사 3년 차인 나는 아직도 새벽 5시에 반사적으로 일어나 주섬주섬 옷을 챙겨 입고 경찰서 형사들을 깨우러 다닌다. 비슷한 시기에 함께 수습딱지를 뗀 타사 동기들과 달리, 아직도 난 새벽 공기를 가르며 밤사이 사건사고를 챙기러 경찰서를 활보하고 있다. 혼자 살던 70대 할아버지가 방 안에서 목을 매
로망 같은 걸 생각해 본 적은 없다. 안락한 삶을 꿈꿔본 적도 없다. 하지만 재수생 생활을 하다 수시로 대학에 붙은 탓에 대학 생활에 대한 기대는 강했었다는 기억이 난다. 그것도 연애쪽으로만. 벤치에 앉아 여자 친구와 ‘꽁냥’ 거리는 상상, 그게 나를 지탱해 주는 즐거운 생각 중 하나였다. 물론 고등학교 시절부터 꿈꿔온 음악 관련 일을 하겠다는 생각도 나를
2011년도 무더웠던 7월, 합격자 명단에서 내 이름을 확인하고 만감이 교차했던 것이 엊그제 같았는데 올해로 나는 2년차 공무원이 되었다. 나의 첫 발령지는 그 당시 많은 논쟁거리가 되었던 ‘친환경 무상급식’을 담당하던 급식팀이었다. 신규 발령을 받고 긴장, 설렘, 걱정 등 다양한 감정을 갖고 있던 내게는 정말 생각지도 못한 근무지였다. 학교급식에 관심이
올해는 소설가 김동리 선생(1913~1995)의 탄생 1백주년이 되는 해이다. 한 작가의 탄생 1백주년을 유독 추모하고 기리는 것은 그의 예술작품이 당대에 끼친 영향이 컸기 때문이다. 그를 재조명함으로써 작품을 빚어낸 그 시대의 상황과 작가의 사상을 파악하고 더불어 작품이 내뿜는 향기, 즉 심화한 예술의 감동을 향유할 수가 있다. 김동리 선생은 1913년
본인은 영화, 다큐멘터리를 만드는 제작사를 직접 설립해서 운영하고 있다. 우리 일의 핵심은 무엇보다도 다양한 사람들을 만나고 그들 중 적절한 사람들을 모아 계획했던 것들을 수나롭게 진행하는 것이다. 사람에서 시작해서 사람에서 끝나는 일이 바로 우리 쪽 일이다. 그런데 온통 사람으로 인해 하루걸러 문제가 터지니 맛문하고 고달플 때가 많은 것도 우리네 일이다.
다음달 17일은 김동리 선생님 18주기다. 8년전 10주기부터 관광버스를 대절해 성남 묘소참배를 한해도 거르지 않고 진행시켜 왔다. 올해는 탄생 100주년이기로 해서, 더 많은 참배 지원자가 신청해 올 예정이다. 비단 묘소 참배뿐 아니다. 지난 17일 김동리 탄생 100주년 기념 하동 ‘역마’ 문학축제를 성황리에 끝마쳤고, 다음달 19일부터 무역센터에서 열
안녕하세요. 중앙대 학생 여러분. 문예창작학과 83학번 정진후입니다. 이렇게 학교신문 지면으로 인사하니 기분이 새롭습니다. 반갑습니다. 저는 국어교사로 사회생활을 시작했습니다. 중학교와 고등학교 국어교사로 지내다 전교조에서 교육운동을 했죠. 교사로 아이들을 가르치면서 느끼는 우리 교육의 문제점과 한계를 너무 많이 알게 됐습니다. 그래서 동료 선생님들과 뜻을
겨우내 움츠렸던 만물이 기지개를 켜기 시작하는 희망찬 달이다. 봄 풀 무성하듯 혈기왕성했던 새 학기의 교정이 아직도 아른하다. 대학시절 행정고시를 합격한 이래 대한민국의 발전을 위해서 온 열정을 다해왔다. 농경사회에서 산업사회로 그리고 다시 정보사회로 이어지는 역사와 기적이 눈앞에 생생하다. 오늘 날 성장은 침체하고 새로운 사회적 요구와 갈등이 속속히 나타
살다 보면 지나치는 풍경들이 있다. 그 풍경을 자세히 들여다보면 저마다 사연이 있는 경우가 많다. 기자에게 있어 수습 생활이란 그 풍경에 스스로를 맡기는 과정을 연습하는 것이다. 단순히 기록하는 사람이라는 한자 말을 가진 ‘기자’이지만, 취재해야 하는 사람과 대상에 깊게 접근하지 않으면 단편적인 기사를 낼 수 있고 심하면 오보까지 생산할 수 있기 때문에 세
한 달 전부터 ‘주식콘서트’라는 프로그램을 연출하고 있다. 증권 전반에 대해 눈높이를 낮춰 알려준다는 것이 기획의도다. 한글교육으로 비유하자면 자음과 모음부터 알려주는 셈이다. 주로 정보에 목마른 중장년층 어르신들이 많이 찾으신다. 딱딱한 사각의자에 노트하나 펴면 다인 한 자 조금 더 되는 책상뿐이라 볼멘소리도 할 만한데 그 분들의 눈빛은 되레 아이처럼 생
‘We don't do good television, we do the News.' 지난해 7월, 한 50대 조선족 여성이 7년간 함께 살던 남편이 휘두른 흉기에 찔려 숨졌습니다. 취재를 위해 들어간 집 안. 저는 반사적으로 가족 앨범을 찾았습니다. 한때나마 단란했던 가정의 모습이 비극을 더욱 슬프게 만들어 줄 거란 생각이 들었지요. 무엇보다 ‘방송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