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릴 적 도미노를 자주 연결하곤 했습니다. 고사리 같은 손에 집혔던 도미노 블록이 하나하나 세워질 때마다 온 몸에 퍼져 있던 신경은 오롯이 하나가 됐습니다. 그러다가 잡고 있던 블록을 떨어뜨려 다른 블록들이 쓰러지는 끔찍한 상상을 하기도 했습니다. 이따금씩 끔찍한 상상이 실제로 일어나기도 했습니다. 마지막까지 신중하지 못했던 손놀림 때문에 그간 세웠던 모든
2년 전이었습니다. 3월이 무색하리만큼 너무도 추웠던 그 날, 아직 어색한 숭실대 앞 자취방을 혼자 나섰습니다. 중앙대 방면이 적힌 5511번 초록색 버스를 타고 첫 등교를 하는 날이었습니다. ‘중앙대 후문’이란 안내 방송이 나오자 학생들이 주섬주섬 짐을 챙기길래 저도 내릴 준비를 했지요. 문이 열리고 줄곧 재학생으로 보이는 무리에 합류했습니다. 그러곤 최
신문사에 들어오면서 친구들만 만나면 ‘군대 언제가냐’는 소리를 듣습니다. 그럴 때마다 저는 ‘조만간’이라고 일관합니다. 친구들 앞에서 무덤덤한 척, 의연한 척 말했지만 괜히 울적해지는 건 사실입니다. 괜시리 가슴이 쿵.쾅.쿵.쾅 뛰기도 하지요. 죄를 지은 것도 아닌데 왜 그럴까요. 문제는 제 나름의 개인적인 상황을 이야기해도 그들에게 씨알도 먹히지 않기 때
얼마 전 블로그를 시작했습니다. 나름 고민이 묻은 제목을 내걸고 그럴듯한 뜻까지 덧붙였습니다. 게시판 하나하나마다 이름을 붙이고 쓰임을 정하고 있자니 웬만한 살림살이 꾸리는 것과 맞먹었습니다. 어느 정도 틀이 완성되니 막 가구배치 끝낸 집주인처럼 흐뭇해지기까지 했습니다. 눈치 빠른 고향친구 녀석에게 연락이 왔습니다. “블로그 시작했다며?” “1인 미디어 시
귀가길마다 종종 겪는 신기한 일이 있습니다. 그간 걸어온 거리가 얼마나 되었든 집 근처에 도착할 때 쯤이면 갑자기 화장실이 가고 싶어지는게 바로 그것입니다. 오랜 시간동안 버스를 타거나 하루종일 바깥에 있어도 별다른 반응이 없었는데, 막상 집에 들어가기 위해 현관문 앞에 설때면 문이 열리는 몇초를 기다리는 것조차 어려울 정도로 조급해집니다. 주변사람들에게
나름의 논리를 갖춘 상대를 만났을 때 그 논리를 반박한다는 건 쉽지 않습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상당한 시간과 장고를 거듭한 끝에 자신만의 논리를 확립하기 때문입니다. 토론프로그램에 자주 등장하는 화려한 언변을 가진 논객이 아닌 이상, 상대가 논리를 세우기 위해 들였던 시간과 노력 이상을 쏟아 부어야 겨우 대등한 위치에서 이야기 할 수 있습니다. 가끔 몇차
세상에 수많은 구경거리가 있지만, 그중 가장 재밌는 건 단연코 싸움구경입니다. 제가 다니던 고등학교에선 “싸운다!”는 소리만 들리면 전교생이 한곳으로 모이곤 했습니다. 저만이 겪었던 특이한 경험은 아닐겁니다. 저의 고등학교 은사님은 싸움구경에 열광하는 제자들을 보며 마치 ‘동물 같았다’고 말하곤 하셨습니다. 싸움 구경을 좋아하는 건 인간의 본능인가 봅니다.
취재를 다니다 보면 종종 익명보장을 요구받곤 합니다. 이유는 다양합니다. 일반 학생들의 경우 신문에 이름이 나오는게 창피하다고 말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특정 부서의 실무를 담당하는 교직원들은 너무 자주 신문에 등장하는 게 보기 좋지 않다며 나름의 고충(?)을 털어놓기도 합니다. 취재원들이 익명을 요구한다는데, 들어주지 않을 이유는 없습니다. 반대로 누가 시
학내 이곳 저곳을 돌아다니다보면 정말 많은 이야기를 듣습니다. 그중 상당부분이 중대신문에 대한 의견입니다. “좋은 기사다” 혹은 “잘 읽었다”는 격려의 목소리도 많지만 “지나치게 편향된 의견을 실었다”거나 “특정 단체의 의견만을 들었다”며 편향성을 지적하는 의견도 심심치않게 들려옵니다.편향성을 배제하고 최대한 객관적으로 사안을 바라보기 위해 노력해도 비판은
선거로 가득찬 세상입니다. 오는 12월 19일 진행되는 제 18대 대통령 선거 때문입니다. TV를 틀어도 신문을 펼쳐도 온통 선거 얘기뿐입니다. 향후 5년간 나라를 이끌어 갈 인물을 뽑는 중요한 투표인만큼 국민들의 관심도 지대합니다. 예비 사회인인 대학생도 이번 선거에서 빠질 수 없는 중요한 유권자들입니다. 지난해 한국 사회를 휩쓴 반값등록금 열풍과 ‘88
“이것도 쓸 수 있을까?” 매주 기자들이 가져오는 기사거리를 지면에 실을 수 있을지 판단할 때 마다 하는 고민입니다. 단순 홍보나 정보전달 기사가 아닌 기자가 직접 문제를 제기하는 발굴기사를 늘려보자는 주문에 후배들은 진지한 표정으로 기사거리를 가져오곤 합니다. 굵직한 정치 스캔들이나 국제적 사건을 주로 다루는 일간지에 제 눈이 익숙해진 탓일까요. 발로 뛰
부끄럽지만 어렸을 적 제 별명은 ‘꼴통’이었습니다. 부모님께선 제가 사고를 칠 때마다 “몇번을 말해도 왜 고치질 않냐”며 “이 꼴통아!”라고 혼내시곤 했습니다. 남의 말을 잘 듣지 않는건지, 듣고도 한귀로 흘리고 있는진 모르겠지만 어린 시절의 저에게 부모님의 말은 별로 약발이 먹히지 않았습니다. 머릿속엔 “자꾸 왜 잔소리야”라는 생각만 가득했으니까요. 덕분
꺼진 불도 다시 보자. 자나 깨나 불조심과 함께 화재예방 표어의 양대 산맥을 이루는 유명한 문구입니다. 초등학교 시절의 어느 가을날, 저의 은사님께선 학교 곳곳에 걸려있던 빨간색 문구를 가리키며 “아차 하는 순간 커지는게 불”이라며 화재 예방의 중요성을 강조하셨습니다. 발을 비비며 불을 끄는 시늉을 하시던 선생님의 모습이 아직도 생생합니다. 매년 가을이면
송구스럽습니다. 지난주 이 코너를 통해 ‘꼬투리를 잡고 싶어도 잡을 수 없는 신문을 만들겠다’고 약속했지만 지켜내지 못했습니다. 오타가 나오고야 말았습니다. 월요일 발행된 신문을 들여다보며 하나 둘 오타를 찾을 때 마다 쌓여가던 부끄러움은, 위에서 인용한 문장 바로 다음에도 틀린 부분이 있었다는 사실을 알게 됐을 때 폭발하고야 말았습니다. ‘뜨거운 가슴’
중대신문 기자로 활동을 시작한지 벌써 다섯학기입니다. 누군가 저에게 “남은 게 뭐냐”고 물어볼때 저는 제 얼굴을 불쑥 내밀곤 합니다. 보기 곤란하게 생긴 얼굴을 내미는 이유는 2년 동안 다져진 ‘뻔뻔한 낯짝’을 자랑하기 위해서입니다. 기사거리라면 무조건 달려가 수도 없이 취재원들을 귀찮게 하다 보니 어느새 문전박대에도 꿈쩍 않는 단단한 낯짝을 갖게 됐습니다